[문화유산 돋보기 답사]다산 정약용 「梅花屛題圖」

입력 1998-05-26 07:00수정 2009-09-25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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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1836)도 그림을 그렸다. 한국 사상사에 가장 찬연한 업적을 남긴 조선 실학의 최고봉 다산. 뜨거운 애민정신으로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을 꼿꼿이 견뎌내고 ‘목민심서’와 같은 역저를 집필했던 다산.

그 강진에서 다산은 그림도 그렸던 것이다. 다산의 그림은 ‘사사로운 감정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강인한 사상가였을 것이란 우리의 통념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두고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애틋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바로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1813·고려대박물관)’.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마리. 그래서 ‘매조도(梅鳥圖)’라고도 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다산의 절절한 그리움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유배생활 13년째 되던 해 여름에 그린 이 매조도는 위쪽에 매화와 참새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시 한 편과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 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몇 해 후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는데 너무 오래 되어 붉은색이 다 바랜 것이었다. 그것을 오려 족자 4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또 그 나머지로 이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부인이 보내준 비단 치마를 오려 딸에게 보내는 그림을 그리다니. 유배지 삶의 곤궁함과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전문가들은 다산의 내면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 작품을 꼽는다. 그림 내용도 사연 못지 않다. 우선 저 먼 데를 바라보는 새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럽다. 다산의 애틋한 부정(父情)이라고 할까. 매화의 꽃망울이나 참새의 자세는 단아하고 깔끔하다. 봄날의 정겨운 시정(詩情)을 포착한 다산의 눈이 해맑고 차분하다.

약간 서툰 듯한 필치는 오히려 유배지의 적요로운 풍경과 다산의 맑은 심성을 돋보이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두고온 고향, 두고온 자식, 두고온 조선 백성에 대한 그리움까지. 이 모든 내면세계는 어떠한 꾸밈이나 가식도 없이 진솔하고 순수하게 표출되어 있다.

유홍준 영남대교수(한국미술사)는 “붓의 쓰임새가 단조롭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구사하지 못했건만 화면 전체에 감도는 눈물 겨운 애잔함이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상찬(賞讚)한다.

봄 풍경을 타고 전해오는 아련한 슬픔. 매조도의 감동은 그래서 깊고 그윽하다.

다산의 글씨도 마찬가지다. 이 서체는 그의 대표적인 행서체(行書體·정자체와 초서체의 중간). 단정하면서도 기우뚱한 서체는 상쾌하고 순수한 개성미와 다산의 강단(剛斷)을 잘 담아냄으로써 매화 참새 그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산의 인간적 체취가 흠씬 배어 있는 그림, 매조도. 지금 고려대박물관에 가면 그 애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묵향’ 특별전. 김홍도 정선 등 쟁쟁한 조선화가들의 걸작 58편도 함께 전시중이다. 6월19일까지, 토 일요일 휴관.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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