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호남평야]평원의「巨山」 전봉준 강증산

  • 입력 1997년 12월 17일 20시 49분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의 진정한 라이벌은 과연 누구일까. 학자들의 말대로 강경파 김개남일까. 아니다. 어쩌면 그의 진정한 라이벌은 강증산(1871∼1909)일지도 모른다. 녹두장군이 1894년 동학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었을 때 전봉준은 우리 나이로 마흔살이었고 증산은 스물네살이었다. 열여섯살 차. 증산은 전봉준의 무력혁명에 철저히 반대했다. 한발 나아가 증산은 동학의 모의장소나 동학군을 쫓아 다니면서 『겨울에 쫓겨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며 말리고 다녔다. 그 대신 증산은 후천개벽을 외치며 민중의 해원상생(解寃相生·한을 풀어줌으로써 서로가 함께 사는 것)을 위한 천지공사(天地公事·농악을 이용한 일종의 굿)에 주력했다. 과연 증산의 말대로 혁명이 끝난 후에 20만∼50만명(학자들 추정)이 죽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우주주의자 증산과 민족주의자 녹두장군. 둘 다 호남평야의 끝자락 고부의 말목장터를 사이에 두고 지척(5㎞)에서 살았지만 둘 사이에 서로 알고 지낸 흔적은 없다. 전봉준이 증산을 소문으로나마 알고 있었는지도 드러나 있지 않다. 반대로 증산은 전봉준의 혁명방식은 반대했지만 전봉준의 높은 뜻은 인정했다. 증산은 전봉준이 교수형으로 죽자 『세상사람이 전봉준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감히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당시 호남평야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따라 농민군으로 나서거나 그렇지 못하면 십시일반으로 군량미를 댔다. 또 일부는 증산을 따라 그의 신도가 되었다. 증산도 결국 서른아홉살에 『이 세상의 모든 병마를 내가 다 대속한다』며 눈을 감았다. 길은 달랐지만 둘 다 목숨을 바쳐 백성을 사랑하는 붉은 마음은 같았던 셈이다. 김제 모악산 주변에는 두 사람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증산의 무덤, 증산이 서른한살에 도를 깨우친 대원사, 천지공사를 벌였던 구릿골, 전봉준이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원평의 구미란, 전봉준이 열여덟살까지 살았던 황새마을 등이 바로 그곳이다. 〈김화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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