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홍의 세상읽기]「거품 사랑」

  • 입력 1997년 4월 8일 08시 01분


따르릉! 또 무슨 전화람. 『예, 황인홍입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응대를 한다. 『아빠, 저 성하예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언제 그랬느냐 싶게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 통에 아이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 학교는 잘 다녀오고』 『예, 그런데 오늘 언제 오세요』 아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대개 무엇을 사고 싶을 때다. 『조금 늦을 것 같은데, 뭐 필요한 게 있나 보지』 『그게 아니고요. 제가 조금 아파요』 열이 나고 기침을 하면서 목이 아프고 배도 아프단다. 감기이겠지. 요즘 감기가 대유행인데. 증세로 보아 독감일지도 모른다. 『엄마 좀 바꿔줄래』 아내에게 몇 가지 약 이름을 불러주었다. 『벌써 다 먹였어요』 『그럼 됐네. 그런데 왜 전화를 했지』 『알잖아요. 우리 아이들 아프면 당신만 찾아요』 듣기 좋은 말이다. 이럴 때에는 내 직업이 괜찮게 생각된다. 그렇다고 아이가 아프다는데 기쁜 내색을 할 수는 없다. 『약 먹었으면 아빠가 의사라도 더 해줄게 없는데 왜 찾지』 『아빠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가봐요』 그래, 아이가 전화로 찾은 것은 의사가 아니었지. 전화를 받을 때는 나도 아빠였는데, 아이가 아프다고 하는 순간 의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건 그렇고 아프다고 아빠를 찾는다니 이건 더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 것은 모조리 엄마들 차지인 줄 알았는데. 자아식, 그래도 아빠에게 정을 많이 느끼는구나. 정신없이 살면서도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빠로 보일 수 있는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가만 있자. 그런데 내가 일찍 들어간 날이 언제였더라. 지난 일주일은 모두 늦었고, 그 전 주 금요일이었나. 퇴근 후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건넸다. 『그래도 아이들이 내가 저희들을 아껴 주는 것을 느끼나 보지』 아내의 반응은 그야말로 「피식」이었다. 『요즘은 어른들한테도 왕자병이 있나보죠』 『…』 『아이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사실은 나도 그것이 궁금했다. 『다 제 덕인 줄 아세요. 제가 아이들에게 늘 이야기하거든요. 아빠는 너희들을 무척 사랑한다고』 그랬구나. 『아이들이 당신에게 느끼는 사랑은 거품사랑일지도 몰라요』 거품사랑이라. 어느새 나는 무관심한 아빠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딱하게도 자상한 아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구먼. 앞으로는 생각을 달리 해야할 것 같아』 『그래요. 조금 일찍 들어오세요』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고, 자상한 아빠라는 생각을 안하겠다고』 한데 아내에게 그나마 거품이라도 계속 일으키도록 해야겠지. 그렇게 하자면 아내에게 무엇인가 해주어야 할텐데. 에라 모르겠다. 그건 누워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지 뭐. 황인홍〈한림대교수·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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