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월드컵]선수잡는 자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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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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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문 앞서 어디로 튈지 몰라”
“슈팅해도 어디로 갈지 몰라”

#장면1. 13일 미국과 잉글랜드의 C조 조별리그 첫 경기. 0-1로 뒤진 미국의 클린트 뎀프시가 전반 40분 아크서클 5m가량 앞에서 왼발 슛을 쐈다. 땅에 두 번 튄 공은 잉글랜드 골키퍼 로버트 그린의 정면으로 향했지만 그린의 손바닥을 맞고 튀더니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장면2. 이어 열린 C조 알제리-슬로베니아전. 0-0이던 후반 34분 슬로베니아 로베르트 코렌이 아크서클 왼쪽에서 오른발 슛을 날렸다. 땅에 한 번 튄 공을 알제리 골키퍼 파우지 샤우시가 잡으려 했지만 공은 그의 왼팔에 맞고 골네트를 흔들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골키퍼의 실수였을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미국의 골키퍼 팀 하워드는 “그린의 실력은 뛰어나다. 자불라니가 예측할 수 없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알제리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은 코렌은 “골키퍼들이 자불라니의 적응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슛을 많이 쐈고 그중 하나가 골로 연결됐다. 다소 행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공인구 자불라니가 대회 초반부터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마찰 높이고 공기저항 줄이려
표면에 특수 돌기-홈 만들어


남아공 공용어 중 하나인 줄루어로 ‘축하한다’는 뜻의 자불라니는 역대 월드컵 11번째 공인구. 11가지 색깔이 쓰였고 축구 한 팀인 11명, 남아공의 11개 부족을 아울러 상징한다. 제조사 아디다스는 자불라니를 출시하면서 거창한 의미만큼 거창한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역대 어느 공인구보다 구(球)에 가까울 뿐 아니라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정확성도 높인 스포츠과학의 결정체라는 내용이었다.

구에 가깝다는 것은 사실이다. 1970년 처음 등장한 아디다스 공인구는 32개의 패널(조각)로 이뤄졌지만 자불라니의 패널 수는 8개에 불과하다. 완벽한 구체를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휘어진 모양의 패널을 이어 붙였다. 여기까지는 자랑할 만하다. 문제는 공의 표면 마찰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표면에 특수 돌기를 가득 만들어 놓았고, 공기 저항을 줄인다는 이유로 홈을 파놓았다는 것. 그러나 돌기와 홈의 배열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아 빠르고 반발력이 높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물단지가 됐다.

반발력 크지만 컨트롤 안돼
이번대회 골가뭄 주범으로


자불라니는 이번 월드컵에서 골키퍼들에게 어이없는 실점의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골 가뭄의 주범으로도 지목된다. 13일 현재 8경기에서 나온 골은 13골. 경기당 1.63골로 2006년 독일 대회 초반 8경기에서 나온 2.25골, 2002년 대회 8경기에서 나온 3.13골에 비해 매우 적다. 강하게 찬 프리킥은 선수의 의도와 달리 어이없이 번번이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의도대로 공을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공의 반발력이 좋다 보니 패스가 조금만 강해도 바운드된 이후 예상한 지점을 훌쩍 지나치기 일쑤다. 브라질 골키퍼 줄리우 세자르는 “자불라니는 끔찍하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파는 (싸구려) 공 같다”며 혹평을 퍼부었다. 1월 남아공 전지훈련 때부터 자불라니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 온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낙하지점을 포착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자불라니는 기존 공보다 반발력이 크고 바운드가 빠르다. 일관된 타이밍에 맞춰 훈련해 온 골키퍼들은 순간의 차이로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의 단편적인 맹신이 만든 자불라니. 선수가 공을 잡는 게 아니라 공이 선수를 잡고 있는 형국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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