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의 오은선 품엔 故고미영 대장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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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함께 오르자”
2 년전 맺은 약속 지켜
고인사진 천에 싸 정상에 묻어


오은선(44·블랙야크)과 고미영은 2008년 초 여성산악회 회원들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2009년 안나푸르나(8091m)에 함께 오르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8000m 이상 봉우리 14개를 먼저 오르려는 목표가 있었지만 경쟁보다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국내 여성 산악인 최초로 에베레스트(8850m)에 오른 지현옥이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지 10년이 되는 해에 그를 기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고미영은 그해 7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 정상에 오른 뒤 하산 길에 유명을 달리했다. 고미영의 사망은 과열 경쟁 논란으로 번졌다. 마음고생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다. 당시 오은선은 ‘14좌 완등 도전을 접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마음을 다잡은 오은선은 9월 혼자 안나푸르나로 떠났다. 원정대의 안전을 기원하는 현지 전통 의식 라마제에서 그는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고미영의 사진을 제단 앞에 내려 놨다. 사진 속 고미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오은선은 그럴 수 없었다. 애써 사진 속 고미영과 눈을 맞췄다.

“미영아, 잘 지내니. 같이 오고 싶었는데 나 혼자 왔네. 영혼이라도 꼭 같이 올랐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오은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찬 눈보라와 거센 바람에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 3월 오은선은 다시 안나푸르나로 향했다. 이번에도 고미영의 사진을 가져갔다. 악명 높은 안나푸르나와 사투를 벌이는 오은선의 가슴에는 고미영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지난해 7월 낭가파르바트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 길에 세상을 떠난 고미영의 영정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7월 낭가파르바트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 길에 세상을 떠난 고미영의 영정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27일 정상을 50여 m 남겨놓고 오은선은 기진맥진했다. 한 발짝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는 오를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오은선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태극기를 펼쳐 들고 방송 카메라 앞에서 온 국민을 향해 기쁨의 소감을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도 잊지 않았다. 가슴에 품고 온 고미영의 사진을 고이 정상에 묻었다.

오은선은 약속을 지켰다. 비록 고미영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오은선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밟았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14좌 완등 공인, 홀리 재인증 남아▼

경쟁자 스페인 파사반, 칸첸중가 등정에 의혹 제기
홀리여사 ‘인증→논쟁중’ 바꿔… “오은선 다시 인터뷰”


오은선이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 완등에 성공했지만 ‘완벽한 인정’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4좌 완등을 놓고 경쟁한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37)이 지난해 5월 오은선의 칸첸중가(8586m) 미등정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파사반은 산악인들 사이에 ‘히말라야 고산 등정 인증 담당자’로 통하는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86)와 안나푸르나 등정 인터뷰를 하면서 오은선의 칸첸중가 정상 사진에 나오는 로프가 정상 밑 200m까지만 깔려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홀리 여사는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을 ‘인증’에서 ‘논쟁 중(disputed)’으로 바꾼 상태다. 오은선은 조만간 카트만두로 가 홀리 여사를 만날 예정이다. 홀리 여사는 오은선과 칸첸중가를 함께 오른 셰르파와도 다시 인터뷰하겠다고 밝혔다. 홀리 여사는 1963년부터 네팔에 머물며 히말라야 고봉 등정 기록을 집계해온 미국인으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그가 히말라야 등정자들을 정리한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에는 논쟁 중인 산악인도 등정 리스트에 포함된다. 하지만 오은선의 경우는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이 걸렸기 때문에 리스트에 포함되더라도 명확한 인증이 필요하다. 홀리 여사가 인터뷰 뒤 칸첸중가 등정을 최종 인정하면 논란은 일단락되지만 미등정으로 바꾸거나 논쟁 중인 상태로 놔두면 문제는 커진다.

외신도 “오은선이 히말라야의 역사가 됐다”고 보도하면서도 이런 점을 상기시켰다. 영국 BBC는 “오은선과 경쟁을 벌인 파사반이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을 의심하고 있다”며 “칸첸중가 등정은 여전히 논쟁 중”이라고 전했다. AFP통신도 파사반의 주장 등을 들어 “등반 역사에서 오은선의 자리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보도했다.

안나푸르나=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털털하면서 담백한 성격, 목표 정하면 무서울만큼 몰입▼

배경미 회장이 본 오은선

“그런 사람 있잖아요, 보면 볼수록 끌리는. 벗길 때마다 새로운 양파 같은 여자예요, 오은선은….”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오은선을 25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다. 산을 탈 땐 손을 잡아줬고, 미용실에선 검게 그을린 피부 걱정을 하며 함께 웃었다.

한국여성산악회 배경미 회장(46·사진). 1985년 수원대 산악부에서 오은선과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오은선에게 산악 선배이자 친한 언니, 그리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다.

배 회장이 오은선이란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건 대학산악연맹이 1년에 한 번씩 여는 체육대회. “키도 작고 유순하게 생긴 신입생이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하더군요. 악착같이 완주한 뒤 환하게 웃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해요.” 이후 배 회장이 오은선과 ‘절친(절친한 친구)’이 된 계기는 1993년 에베레스트를 함께 등반하고부터. “은선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학 졸업 후 1년 가까이 등반을 쉬었어요. 그래도 만나면 언제나 산 얘기만 했죠. 에베레스트에 가기로 했을 때 그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고 ‘얘는 산악 유전자를 타고났구나’ 생각했어요.”

배 회장이 본 산악인 오은선의 터닝포인트는 2003년 매킨리 등정이었다. 당시 배 회장이 이끈 여대생 원정대에 오은선이 합류했는데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등정에 성공하면서 단독 등반에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 “그 등반 이후 은선이가 조심스럽게 얘기하더군요. 좀 더 큰 목표에 도전하고 싶다고.”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 오은선은 어떤 모습일까. 배 회장은 “성격은 ‘털털, 깔끔, 담백’이란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며 웃었다. 또 “평소엔 털털하지만 목표가 생기면 무서울 정도로 전력투구하는 깔끔한 성격”이라며 “엄청나게 철저하고 냉정해 말 걸기가 무섭기도 하지만 뒤끝 없는 담백한 성격”이라고 전했다.

배 회장은 “은선이가 마음고생하는 걸 지켜보며 가슴 아플 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오은선의 ‘14좌 완등 이후 인생’에 대해서도 살짝 귀띔했다. “학업에 전념하고 여성 산악인을 위한 삶을 살 거예요. 평소 14좌 완등보다 더 힘들다고 한숨 쉰 것도 하나 있는데…. 바로 결혼이죠.”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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