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공이 데굴데굴… 아! 날아간 퍼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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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2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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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의 경기 정민철의 1997년 노히트노런 경기

삼성 선동열 감독이 현역 시절 “나의 후계자”라고 인정할 만큼 한화 정민철 투수코치의 선수 시절 구위는 강력했다. 고졸 데뷔 이래 1998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포함해 지난해 은퇴하기까지 통산 161승. 이 가운데 1997년 노히트노런은 투수인생의 화룡점정이자 전환점이었다.스포츠동아DB
삼성 선동열 감독이 현역 시절 “나의 후계자”라고 인정할 만큼 한화 정민철 투수코치의 선수 시절 구위는 강력했다. 고졸 데뷔 이래 1998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포함해 지난해 은퇴하기까지 통산 161승. 이 가운데 1997년 노히트노런은 투수인생의 화룡점정이자 전환점이었다.스포츠동아DB
아침부터 감이 별로다. 어쩌면 올해는 10승을 못할지도…. 팀 성적마저 저조하고, 복잡한 머리만큼이나 저녁 안개가 자욱하다. 1997년 5월 23일 대전 OB전. 가뜩이나 강타선인데다 내가 유독 약한 팀이라 더 부담스럽다.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다. 그래도 포수가 (강)인권이어서 내심 다행이다. 선배 포수 형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강병철 감독님이 편하게 하라고 배려해주신 것 같다.

생각 같아선 힘으로 윽박지르고 싶은데 오늘은 아무래도 몸이 안 따라준다. 항상 좋을 수야 있겠나. 별 수 없다. 컨트롤에 신경 써야지. 그렇게 던지다보니 6회까지 퍼펙트. 5회 이도형의 홈런성 타구가 파울이 되자 안도감과 자신감이 생겼다. 남들은 놀랄지 모르지만 나는 감흥이 없다. 벤치 분위기도 신경 안 썼다. 5∼6회까지 완벽했던 경기가 한두 번인가. 천하의 정민철인데.

그런데 7회 마운드에 오르니 나도 모르게 의식이 된다. 이번엔 좀 떨린다. 7회도 3자 범퇴. 야구장의 술렁거림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8회, 이제는 1구 1구가 100구를 던지는 기분이다. 왜 이리 시간이 길까. 너무 힘들다. 뒤에서 수비하는 동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공아, 제발 나에게 오지마라’는 간절함이 전해져왔다. 벤치마저 유독 조용했다. 코치님들은 아무 주문도, 격려도 없었다.

8-0인데 감독님이 8회부터 전상열을 중견수 대수비로 기용했다. 역시 기록을 의식하나보다.(이 교체는 적중했는데 9회초 1사 후 OB 이종민의 텍사스 안타성 타구를 전상열이 정면에서 슬라이딩 캐치해 노히트노런을 지원했다)

OB 김인식 감독님도 어지간하다. 프로야구 역사상 첫 퍼펙트 위기에 몰렸는데도 번트 한 번 대지 않는다. 8회초 OB 4번 이도형을 3루 땅볼로 잡았다. 다음은 심정수. 볼 카운트 2-1에서 인권이가 바깥쪽 사인을 냈다. 그런데 몸쪽 높은 쪽으로 공이 갔다. 나의 실수였다. 워낙 컨트롤이 잘돼 인권이가 더욱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심정수는 헛스윙을 했지만 포수 미트 맞고 공이 뒤로 흘러가버렸다.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1루 출루. 퍼펙트가 깨졌다. 아까웠다. 그러나 동시에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 ‘인권이의 마음이 어떨까?’

이선희 투수코치님이 올라왔다. “잘 던지고 있는데 실망하지 말고 마무리 잘 해라.” 인권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표정에서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읽혀졌다. 스스로에게 되뇌어본다. “더 잘 해보자”, “더 잘 던져보자.” 남은 아웃카운트는 5개. 노히트노런이 남아있다.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노히트노런이. 그 기록을 인권이와 함께 하는 것이다.

9회 마지막 타자 김민호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고 경기를 끝냈다. 28명으로 끝낸 노히트노런. 가장 퍼펙트게임에 근접한 노히트노런! 재작년 이 계절(5월)에 타계한 아버지가 생각났다. 믿기지 않는 기쁨이 샘솟았지만 정민철 아닌가? 너무 기쁜 티를 내면 체면이 안 선다. 팀 성적도 안 좋고, 선배들 눈도 있는데. 그래도, 아무리 겸손한 척 하려해도 흥분은 어쩔 수 없었다. 인권이가 건네준 노히트노런 공을 관중석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끝나고 나서 인권이는 일부 관중에게 야유를 받았다. 인권이가 없었으면 노히트노런도 없었을 텐데…. 그 경기 직후 인권이를 포함한 팀 동료들과 축하자리를 열었다. 우연히 OB 안경현 선수가 동석했는데 지금도 기억난다. “솔직히 오늘 볼은 별로였는데 왼 무릎 오른 무릎을 기막히게 파고들더라.”

그 노히트노런 전까지 나는 단순한, 힘에 의존하는 피처였다. 돌이켜보면 그 경기가 터닝 포인트였다. ‘컨디션이 안 좋아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깨달음, 릴리스 포인트의 중요성을 말로만 흘려듣다가 그 경기를 통해 눈을 떴다.(실제 그 시즌 정민철은 10차례 완투, 4차례 완봉 포함해 14승·방어율 2.46을 거뒀다) 내가 그 후 2009년까지 12년 더 현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근원이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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