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양궁 불패신화 깨졌지만… 4년뒤 희망을 쏴라

  • 입력 2008년 8월 15일 02시 56분


“괜찮아”한국여자양궁대표팀의 문형철 감독(뒤)이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에서 중국의 장쥐안쥐안에게 1점 차로 아쉽게 패한 박성현을 위로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괜찮아”
한국여자양궁대표팀의 문형철 감독(뒤)이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에서 중국의 장쥐안쥐안에게 1점 차로 아쉽게 패한 박성현을 위로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성현 “한국서 남은 건 나뿐” 부담감에 패배

中 관중 고함-호루라기 소리에 페이스 ‘흔들’

암투병 문형철 감독, 선수 위로하며 눈물쏟아

대표팀에서 극기 훈련으로 번지 점프를 할 때는 머뭇거리는 남자 선수보다 먼저 수십 m 아래로 몸을 던졌다. 칠흑 같은 밤에 실시된 야간 행군과 담력을 키우기 위해 옷 속에 뱀을 넣었을 때는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강한 정신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그였지만 두 어깨를 짓누르는 우승에 대한 부담감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내며 세계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린 박성현(25·전북도청).

그는 14일 열린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선 평소답지 않게 크게 흔들리며 중국의 장쥐안쥐안(27)에게 109-110으로 진 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쉬운 패배였다.

박성현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2관왕에 오른 큰 무대 체질이었다. 당시 단체전 결승에서는 중국에 마지막 한 발을 남겨두고 10점이면 우승, 9점이면 연장, 8점이면 은메달이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10점을 쏴 금메달에 쐐기를 박았다.

이번 대회 단체전에서도 간판스타답게 여유 있게 동료들을 이끌며 한국의 6연속 금메달을 주도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들보였기에 박성현은 더 큰 기대를 받았지만 이날 결승에서는 달랐다.

한국 양궁의 올림픽 개인전 7연패를 이뤄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쏘는 족족 과녁의 한가운데에 꽂히던 화살은 좌우로 빗나가기 일쑤였다. 결승 12발 가운데 4차례나 8점을 쐈다. 게다가 2엔드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 화살이 연이어 8점에 그치며 추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승 상대였던 장쥐안쥐안이 8강에서 주현정(현대모비스)을, 4강에서는 윤옥희(예천군청)를 제치며 ‘이제 한국 선수 중 남은 건 나 하나’라는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것도 밸런스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한국 여자 양궁은 2000년 시드니 대회와 4년 전 아테네 대회 때는 한국 선수끼리 결승을 치렀기에 이번 대회 같은 긴박감은 없었던 게 사실.

박성현을 8년째 지도한 서오석 전북도청 감독은 “자기 페이스를 잃다 보니 시위를 놓을 때마다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중국의 텃세 응원도 불리했다”고 지적했다.

서 감독의 말처럼 소음 응원으로 일관한 중국 관중은 박성현이 활을 잡을 때마다 고함을 치고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방해 공작을 폈다.

경기 후 갑상샘암 3기 판정으로 수술까지 받아가며 선수들을 지도한 문형철(예천군청) 감독은 선수들을 위로했지만 자신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문 감독은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응원해 주신 모든 분께 죄송할 따름이다. 선배들이 이룬 업적을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나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 선수에게 우리 선수 세 명이 모두 졌다. 상대는 실력 이상으로 너무 잘한 반면 우리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 것 같다”며 패인을 분석했다.

올림픽을 빛냈던 이은경, 김수녕, 김경욱 등 왕년의 신궁들도 해설위원으로 현장을 지켜본 뒤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올림픽 연속 금메달 행진은 멈췄어도 박성현 윤옥희 주현정은 안타까움 속에 새 출발을 다짐했다.

박성현은 “후회가 없고 실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한국 양궁은 연속 우승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준비할 것이다. 나 역시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아경기와 2012년 런던 올림픽 출전을 위해 계속 활을 잡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

오른쪽 어깨가 아파 이틀에 한 번 진통제를 먹으면서 값진 동메달을 딴 윤옥희도 “1년 넘게 준비했기에 시원섭섭하다. 다음 올림픽에서 기회를 얻는다면 꼭 우승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들 세 명은 실력으로 치면 백지 한 장 차이인 수백 명이 출전해 10차례 가까운 치열한 국내 평가전에서 살아남아 태극마크를 달았다. 올림픽을 앞두고는 금메달 행진을 펼치며 한국 양궁의 위상을 높인 언니 궁사들의 뒤를 잇기 위해 온갖 혹독한 훈련 과정을 견뎌냈다.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동고동락했기에 탄탄한 팀워크로 올림픽 금메달을 합작할 수 있었다. 개인전을 앞두고는 “누가 우승해도 한국의 승리”라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로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는 이들에게 벌써 희망이 찾아온 것 같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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