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이종욱’ ...SK가 곤혹스러운 이유

  • 입력 2007년 10월 23일 12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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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SK의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 케니 레이번은 이종욱을 누상에 내보낼 때마다 정상적인 볼 배합을 가져가기 힘들었다. 발 빠른 주자를 의식하다보니 변화구보다 직구를, 그리고 낮은 공보다 높은 공을 구사해야 했다. 때로는 피치아웃으로 공 한 개를 버려야 했다. 레이번은 1회초 고영민에게 133km짜리 밋밋한 변화구를 던지다 1타점 2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때 2루 주자가 이종욱이었다.

<장면 2> 두산의 5회초 공격, 1사 만루에서 김동주가 친 타구는 내야를 겨우 벗어나는 얕은 플라이였다. 타구를 쫓던 SK 2루수 정경배는 3루 주자 이종욱이 태그업을 시도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타구를 잡자마자 마운드 근처로 와 있던 1루수 이호준에게 공을 뿌렸다. 공을 받은 이호준 역시 마음만 급했던 나머지 홈 송구가 매끄럽지 못했다. 결국 내야수도 벗어나지 못한 얕은 플라이가 희생플라이로 둔갑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나온 위 두 장면은 두산의 공격첨병 이종욱의 위력을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다.

시리즈 1차전에서 나온 두산의 2득점을 모두 자신의 발로 만든 이종욱은 기본적으로 던지고 치는 야구에서 베이스러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세삼 일깨워 주고 있는 선수다. 1차전에서도 이종욱은 빠른 스피드를 앞세워 투수는 물론 야수들까지 흔들어 놓았다.

5회초 나온 이종욱의 과감한 태그업은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플레이였다.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은 “SK의 2루수 정경배가 한 두 스텝 나와 홈까지 다이랙트로 송구했다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종욱의 빠른 발에 신경 쓰다보니 성급하게 역동작으로 공을 던졌다.”고 꼬집었다. 허구연 위원은 “결과적으로 내야수 플라이볼로 태그업에 성공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며 SK 수비진의 보이지 않는 실책에 혀를 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종욱의 발이 SK 수비진을 심리적으로 압박한 것은 사실이다. 앞선 3회에도 이종욱의 땅볼 타구를 잡은 정경배가 송구실책을 범했는데 당시에도 빠른 주자를 잡기 위해 공을 급하게 뿌린 것이 화근이었다.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베이스러닝을 발과 머리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빠른 스피드가 필수지만 뛰어야 할 때와 뛰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직감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두산의 이종욱은 학창시절 육상부에 몸담은 적이 있을 정도로 타고난 스피드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발만 빠르다고 지금의 이종욱이 탄생한 것은 아니다. 단거리 육상선수들이 야구로 전향한다고 해서 모두 도루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순간적인 상황을 포착하는 능력과 정지상태에서 곧바로 전력 질주할 수 있는 순발력도 중요하다. 이러한 능력은 직감적으로 몸에 익는 것이지 1~2년 연습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타고난 스피드까지 겸비해야 하는 만큼 주루 플레이가 뛰어난 타자들은 보통 선천적으로 타고나기 마련이다. 한때 최고의 베이스러너였던 KIA의 이종범 역시 “주루는 선천적인 영향이 적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두산의 이종욱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상대 투수의 투구 폼과 버릇 등을 연구해 도루 감행 시 투수의 타이밍을 빼앗는 능력을 기른 것이다. 또한 투구 폼에서 드러나는 상대의 의도를 먼저 읽어 견제나 피치아웃 때도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시리즈 1차전에서 레이번이 몇 차례 피치아웃을 시도했지만 이종욱은 전혀 속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베이스러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럼프도 없는 뛰는 야구의 효과

이종욱의 ‘뛰는 야구’는 한 베이스를 더 가는 결과 뿐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상대 투수와 수비진을 뒤흔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세밀한 스포츠인 야구에서 상대의 집중력을 방해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공략 법은 없다. 또한 빠른 주자를 견제하고 병살타를 유도하기 위해 야수들이 베이스에 가까이 있어야 하니 타석에 선 타자 입장에서는 안타를 만들어낼 공간이 더 넓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종욱의 활발한 주루 플레이는 팀 전체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도 일조한다.

주루플레이는 기본적으로 슬럼프가 없다. 운과도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주루플레이는 순전히 주자 개인의 능력일 따름이며 발로 뛰는 문제이기 때문에 기복 없이 항상 일정하다. 물론 타격이 슬럼프에 빠질 경우 진루가 줄어 결과적으로 주루플레이를 펼칠 기회 자체도 줄어들 수 있겠지만 최근 이종욱의 타격 감을 본다면 그러한 우려도 기우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종욱의 ‘뛰는 야구’가 상대팀 SK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196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에 도루 바람을 일으켰던 모리 윌스(Maurice Wills)는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야구는 뛰는 야구입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뛰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 자신이 무뎌지지 않도록 민첩성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조바심 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윌스의 이 말은 뛰어난 베이스러너들이 가슴 속에 반드시 새기고 따라야 할 금언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두산의 이종욱은 윌스의 금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선수가 아닐까 .

정진구 스포츠동아 기자 jingoo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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