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맛있는 것은 맛이 없는 것과 같다”

  • 주간동아
  • 입력 2023년 11월 19일 11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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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다빈치스쿨] “한국 차는 잎차”… 명상 같았던 지허 스님과 차담

창의적인 사람은 감각이 예민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감수성이 뛰어나다면 후각과 미각도 남다를 것이다. 물론 입맛만 까다롭고 지적 능력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주변에서 많이 본다. “식도락가라는데 정말 맛을 알고 먹는 것일까” 의심이 가는 사람도 흔하다.

“절제, 좋기만 한 것 아냐”
서양에 와인이 있다면 동양에는 차가 있다. [동아DB]
서양에 와인이 있다면 동양에는 차가 있다. [동아DB]
수많은 학문 분야가 먹는 행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식품영양학부터 호텔경영학의 식음료 원가 계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필자가 관심 있는 분야는 맛을 분석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다. 거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일을 미학(味學)으로 명명하고 싶다. 아름다움에 관한 철학인 미학(美學)과도 발음이 같다. 미(味)는 미(美)와 통한다고 해야 할까.

어느 학문을 배우든 개론이라는 과목이 있다. 정치학개론이니 사회학개론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미학개론(味學槪論)을 써보고 싶다. 서론으로 삼을 만한 내용을 고민하는 와중에 “무엇이 맛있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순간도 찾아온다” “최고의 맛은 무엇일까” “궁극의 맛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등 다양한 질문이 떠올랐다. 오래전 한국 차 문화를 대표하는 지허 스님과 나눈 대화 속에 그 해답의 일단이 있었다. 당시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이 1시간의 깊은 명상과도 같았다.

“서양에 와인이 있다면 동양에는 차가 있다”고 한다.

“서양의 와인에 대칭되는 것이 동양의 차다. 와인이 숙성 기간을 거치듯이 차도 숙성 기간이 있다. 봄에 차를 만들어 20~30일 숙성 기간을 둔 후 최종 마무리로 볶는다. 그 앞 과정을 ‘덖는다’고 표현하는데 8~9번에 거쳐 숙성시키는 것을 뜻한다. 영국은 완전 발효차인 홍차를 마시고 중국은 반 발효차를 마신다. 일본인은 찐 차를 좋아하고 한국인은 덖은 차를 좋아한다. 일본 차에서는 한국 차의 향을 느낄 수 없다. 일본인은 차 맛보다 형식을 통해 자신을 절제하고 수련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형식을 통해 내면이 정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절제가 무작정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하는 것이 좋다.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는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물처럼 말이다. 물은 조용히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곡을 따라 떨어지기도, 깊은 곳에 머물기도 한다. 차도 마찬가지다.”

“차에는 절제가 없다”는 얘기도 있다. 차에서 절제를 느낄 수도 있나.

“‘일본 차는 형식에 너무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에서는 고급 차를 선물 받으면 아까워서 못 마시고 모셔둔다. 그러다 귀한 사람에게 다시 그 차를 선물한다. 그러면 그 차를 선물 받은 사람도 아까워서 못 먹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다. 그렇게 차가 여러 번 오간다. 차 맛보다 형식을 더 추구하다 보니 포장만 요란해지고 값도 비싸지는 것이다.”

한국 차는 어떤가.

“형식을 외우는 것이나, ‘다도’니 ‘녹차’니 하는 말은 모두 일본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예부터 그냥 ‘차’라고만 표현했다. 요즘에는 차라는 말도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차라는 말이 너무 오염돼 요구르트나 커피도 모두 차로 불린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정말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두고 한창기 선생 등과 모여 장시간 의논했다. 그래서 만든 말이 ‘잎차’다. 이것이 제일 정확한 우리말 아니겠는가 하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차 마시면 정신 맑아져”
차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우리 문화가 언제부터 인스턴트식으로 변했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모르게 모든 것을 급하게, 바쁘게 처리하려는 태도가 걱정된다. 차를 마시다 보면 인생을 돌아보고 좋은 대화를 나누며 정신세계를 채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차는 한 번 뿌리 내리면 수백 년 동안 죽지 않는다. 나무뿌리가 키의 서너 배 깊이로 땅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뿌리가 깊어야 망하지 않는다. 차가 좋은 이유는 바로 깊게 내린 뿌리로 담백한 물을 빨아올려 잎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솥에 넣고 아홉 번씩이나 정성껏 덖으니 당연히 좋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이 정말 마셔야 하는 것은 차라고 생각한다. 차를 마시면 정신도 맑아지고 좋다.”

무엇보다 차 맛을 알아야 되지 않을까. 요즘 사람들은 자극적인 맛에 너무 길들어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좀 더 아름다운 쪽으로 가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맛이 없는 것 같은 맛이 최고의 맛이다.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나아가 아주 없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맛이다.”

차 맛을 두고 다양한 말이 오간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의 궁극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맛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맛이 있다는 의미다. 조금씩 담담해지는 것, 즉 엷어지는 것 또한 맛이 없는 것 같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육체적 감각의 근본은 ‘있는 것을 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맛있다는 것은 맛이 없다는 것과 똑같다.”

‘정말 맛있구나’라는 느낌은 정작 최고의 맛이 아니라는 말이 인상 깊다.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을 때의 맛이 진짜 맛이라는 의미인가. 어느 화가로부터 “처음에는 별맛이 없더라도 오랫동안 뒷맛이 남는 것이 제일 좋은 맛”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오랜 시간에 걸쳐 따뜻해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 식고, 오랫동안 입안에 은은한 향과 맛이 느껴지는 차가 좋은 차다. 그 자리에서 웃고 마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서서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진짜 우스운 이야기이듯이 말이다. 좋은 차는 입안에 오래 남고 담백하다.”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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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15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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