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정치권에 소환된 ‘앙투아네트의 발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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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

18세기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 사회는 빈부 격차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빵을 구할 수 없어 굶어 죽는 시민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그림)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이 말을 했다는 명확한 근거나 기록은 없습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이 희생양 삼아 만들어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지배층의 민중에 대한 몰이해와 조롱이 담긴 상징적 언술로 회자되곤 합니다. 당시 앙투아네트의 발언이 알려졌다면 평민들이 분노했을 법합니다.

요즘 느닷없이 앙투아네트가 정치권에 소환되어 회자되고 있습니다. 1일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전세가 월세로 전환되는 것이 나쁜 현상인가요’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논란이 커졌습니다. 윤 의원은 “은행의 대출을 받아 집을 구입한 사람도 대출금의 이자를 은행에 월세로 지불하는 월세입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며 “전세로 거주하시는 분도 전세금의 금리에 해당하는 월세를 집주인에게 지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개인은 기관과의 경쟁에서 지기 때문에 결국 전 국민이 기관(은행)에 월세를 지불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민주당 주도로 통과시킨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임대차 3법)을 옹호하는 취지의 발언입니다.

이에 대해 황규환 미래통합당 부대변인은 “정작 자신은 다주택자면서 ‘의식 수준’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생각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빚내서 전세를 살 수밖에 없는 사람 중에 매월 월세까지 감당할 수 있는 서민이 몇이나 되겠나”라며 실패한 부동산 정책으로 전세 시장을 망쳐 놓고 월세 전환을 준비했다는 논리로 포장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누리꾼들은 “월세에서 전세를, 전세에서 내 집 마련을 꿈꾸는데 황당한 얘기를 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세입자들은 목돈 마련에 도움이 되는 전세를 선호하는데, 집권 여당 의원이 서민의 설움에 무지하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지난해 1월 김현철 전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취직이 안 된다고 헬조선이라 하지 말고 동남아에 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야당은 즉각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앙투아네트식 사고 아니냐며 꼬집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연방 정부의 셧다운이 장기화됐을 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표현으로 앙투아네트가 소환되기도 했습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공무원들이 무료급식소나 노숙인 보호소에 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은 윌버 로스 상무장관이 “공무원은 사실상 무이자 수준의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이 대출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발언을 두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케이크를 먹으라’의 자세냐”고 반문했습니다.

21세기에 느닷없이 등장한 앙투아네트는 양극화와 계층 갈등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대중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고 겉도는 정치권력의 민낯을 보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
#마리앙투아네트#정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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