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환경 이야기]산사태 많은 필리핀… “나무 10그루 심어야 졸업할 수 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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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환경을 위한 졸업유산법’

필리핀은 지형적 특성과 난개발로 인한 산사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2014년 필리핀 톨루사 지역에서 태풍으로 인한 산사태 피해를 복구하는 모습. 뉴스1
필리핀은 지형적 특성과 난개발로 인한 산사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2014년 필리핀 톨루사 지역에서 태풍으로 인한 산사태 피해를 복구하는 모습. 뉴스1
1960, 70년대 학생들은 식목일이면 인근 야산에서 나무를 심는 행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나무 몇 그루는 심을 수 있었죠. 그런데 나무를 심어야만 졸업할 수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실제로 필리핀에서는 나무 10그루를 심지 않으면 학교를 졸업할 수 없습니다. 2019년 5월 29일 필리핀 의회는 ‘모든 학생은 졸업을 위해서 1명당 10그루의 묘목을 심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른바 ‘환경을 위한 졸업유산법’은 필리핀 학생들이 기후와 지형에 맞는 나무를 정해진 구역에 심도록 했습니다. 필리핀은 왜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요?

필리핀은 무분별한 삼림 훼손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특히 산사태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많습니다. 2018년 9월 19일 벵게트주 유캅 마을에서 태풍 ‘망쿳’으로 8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실종됐습니다. 2006년 2월 17일 레이테주에서는 열흘간 호우와 지진이 겹쳐 1126명이 사망했습니다.

필리핀은 열대우림 지역인데 왜 삼림이 파괴되어 산사태가 발생할까요? 필리핀은 오랫동안 식민지 시대를 겪었습니다. 1565년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해 1898∼1902년에는 미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 이후에도 식민 시대의 피해는 남아 있습니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이 대규모 플랜테이션입니다. 스페인은 18세기 말 설탕과 담배 등 환금작물을 장려하고 사탕수수, 코코넛, 차, 고무, 바나나 등 열대작물 위주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 체제를 구축합니다. 이 수익금으로 식민지 경영의 자금을 모았습니다.

플랜테이션을 운영한 계층은 지주 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개간된 땅을 농민으로부터 빼앗고 내야 할 각종 세금을 농민들에게 부과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16세기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할 당시만 해도 필리핀은 바랑가이(barangay)라는 소규모 촌락 중심으로 토지를 공동체적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은 사적 대토지 소유화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국왕이 스페인 교회와 성직자, 식민화에 앞장선 군인과 정착자들에게 사법권과 토지를 하사하였습니다. 이를 엔코미엔다(encomienda)라고 합니다. 이후 지방 귀족과 중국인 상업자본가들이 지주 계급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미국이 지배하면서 대토지 소유 제도는 더욱 공고해져서 지주-소작 관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계급구조는 독립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지주제를 폐지하고 자작농을 확립하려고 토지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지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여러 단체를 만들어 의회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토지개혁은 지금까지 지주-소작농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미완성입니다.

필리핀은 과거 삼림 면적이 국토의 70%에 이르렀으나, 식민지 시절 대규모 플랜테이션과 일본 기업들의 무지막지한 벌채로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20% 수준까지 줄었다가 최근 점점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한 무분별한 난개발이 산사태를 만들고 있습니다. 1999년 8월 2일 체리힐 주택단지에서 발생한 산사태는 필리핀의 지형 특성을 무시한 난개발 때문이었습니다. 체리힐 주택단지는 50m 고도의 구릉지대를 절개해 조성했습니다. 1991년에 완성했으나 위법 사항이 많아서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1994년에 환경부의 특혜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신생대 화산성 퇴적층인 이 지역은 수평층의 지질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남북 방향으로 절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지층이 점토, 실트로 이뤄져 잘 굳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배수로를 파놓으면 물이 구덩이에 고이고 암석 틈 사이로 들어가 풍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폭우가 올 때 토질층이 유출되면서 주택들이 무너집니다.

필리핀은 필리핀 해구와 동중국해로부터 횡압력을 받으면 지진, 화산 등 지각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개발 시 지질구조를 잘 진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부패로 인한 인재까지 더해져 불상사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국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우선 국가의 주역이 될 학생들이 올바르게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필리핀의 ‘환경을 위한 졸업유산법’은 이런 취지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2008년 제정된 환경교육진흥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학생들에게 단순히 환경 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법은 아닙니다. 환경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시민이 되어 지속가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정치인을 뽑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며,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시민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환경교육은 한 분야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더 나아가 지구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필리핀보다 환경교육진흥법을 먼저 만들었지만 필리핀처럼 강력하게 실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최근 미세먼지 등 환경 악화와 그레타 툰베리를 통해 관심이 커지고 있는 기후변화 관련 시위 등을 계기로 환경교육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환경교육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절박한 필요에 의해 환경교육이 실시될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환경교육은 더 강력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이수종 서울 신연중 교사
#필리핀#산사태#졸업유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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