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이전 공기업, 신의 직장서 인간의 직장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신입사원 이탈에 지원자 감소까지…

‘신의 직장’으로 불리던 공공기관들이 본사 지방 이전을 앞두고 ‘인간의 직장’으로 강등당하는 분위기다. 입사 희망자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젊은 사원들이 속속 회사를 그만두고 있다. 모두 ‘서울을 떠나기 싫다’는 게 이유다.

○ “지방 이전 안 하는 공기업 없나요?”

수도권의 148개 공공기관(공기업 포함)은 내후년까지 전남 나주, 강원 원주 등 전국 10개 혁신도시로 본사를 옮긴다. 취업준비생들은 어렵게 공공기관에 합격하더라도 곧장 지방에 내려가야 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최근 ‘취업 뽀개기’ ‘공공기관을 준비하는 사람들’ 등 취업 관련 대형 인터넷 카페에는 공공기관 취업준비생들의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에 남는 공기업 명단’을 공유하는가 하면 익명 게시판에는 ‘서울의 대기업과 지방 이전 예정 공기업 중 어느 곳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글도 수시로 올라온다. 결론은 ‘정년이 짧더라도 대기업이 낫다’는 쪽이다.

취업준비생들이 매긴 ‘현 상태와 장래성을 모두 감안한 공기업 서열’의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 역시 지방 이전 여부다. 서울에 남는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한국무역보험공사 등 금융공기업이 상위권을 싹쓸이했고 서울시 산하기관들도 같은 이유로 상위권에 랭크됐다. 반면 한국가스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전력공사 등 지방 이전을 앞둔 곳들은 최하위권인 25∼28위에 그쳤다.

일부 취업준비생들은 공공기관 대신 대기업 입사나 공무원시험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다니던 중견 기업을 지난해 그만두고 공기업 취업을 겨냥했던 이모 씨(27·여)는 이제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공기업이 영화관 편의점조차 없는 허허벌판으로 내려가는 것 아니냐”며 “이제 결혼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데 가족과 친구, 문화생활까지 포기하고 연고도 없는 곳으로 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 공사 관계자는 “최근 2년간 입사지원자를 분석한 결과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이 현저히 감소했다”며 “지방 이전이 확정되고 지난해 신사옥 기공식을 한 뒤로는 서울지역 지원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이런 세태의 영향으로 공기업 취업 수험서의 인기도 떨어지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3만1500권이던 관련 서적 판매량은 올해 같은 기간 2만9500권으로 6%가량 감소했다.

○ 신입사원들도 퇴직 러시

젊은 직원들의 퇴직 러시 때문에 공기업은 인적자원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지방 이전을 앞둔 A공사의 퇴직자는 2008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에 이른다. 2010년 가장 많은 26명이 회사를 그만뒀는데 올해는 지난달까지 이미 21명이 사표를 냈다. 올해 초 이 공사에 입사한 박모 씨(29)는 “입사 동기 중 상당수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직하자’고 생각하고 있다”며 “나도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지방에 내려갈 수 없다고 해 민간기업을 알아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퇴직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이름난 B공사 역시 지난해 한꺼번에 14명이 회사를 떠났다. 공사 관계자는 “지방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배우자를 찾는 젊은 직원이 많아져 사내 커플이 급증하고 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국책연구소의 박사급 인력들도 동요하고 있다. 내년 11월 세종시 이전을 앞두고 있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예년보다 더 많은 연구인력을 뽑기로 했다. 최근 연구인력 이탈이 많아진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으로 이전하는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일부 연구원은 대학과 대기업 연구소에 이직을 타진하기도 했다. 이 밖에 국가정책 수립에 관여했던 공공기관의 박사급 연구인력들도 주요 민간연구소로 옮기기 위해 관련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공기업#지방이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