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Harmony]‘영원한 현역’ 손숙 “은퇴? 내 인생의 모노드라마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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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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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을 만나다


대사를 맞받아쳐줄 이도 작은 몸짓으로나마 반응해줄 이도 없다. 70세에 가까운 배우 손숙(68)이 오롯이 혼자 무대를 감당하고 채워야 하는 시간은 70분이나 된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모노드라마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의 극본은 A4 용지 크기로 21장. 엄청난 양의 극본을 수백 번 꼭꼭 씹어 삼킨 듯한 그는 민주화 항쟁이 한창일 때 아들을 잃은 엄마로 온전히 분한다. 수백 번 극본을 분석하며 그러모은 감정이 무대 위를 꽉꽉 채운 뒤 관객석 구석구석으로 퍼질 때 관객들은 아들 잃은 엄마의 감정에 동화돼 함께 울다 결국에는 아껴뒀던 70분 치 환호를 쏟아낸다.

○ 네 번째 모노드라마 도전

손숙이 또 한 번의 모노드라마 공연을 마친 5일. “노배우에게 혼자 70분을 채울 에너지가 있겠어?” 하는 걱정을 비웃듯 관객이 다 빠져나간 극장 곳곳에는 손숙이 남긴 에너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지난달 24일 시작돼 이달 23일까지 이어질 예정인 이번 공연을 위해 여름내 35도에 달하는 폭염,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의 외로움과 사투를 벌였다. 스스로 ‘모노드라마는 엄청난 일이자 고된 수양’이라고 말하면서도 모든 배우의 꿈이자 혼자 무대를 빽빽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모노드라마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벌써 네 번째 모노드라마 도전이다.

생방송 라디오 진행자, 아름다운가게 공동 대표 등 연극 이외의 수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하루 3시간 이상을 극본 외우는 데 매달렸다. 21쪽 분량의 극본을 일주일 동안 모두 외우려고 대사를 300마디씩 나눴다. 새벽 2, 3시에 깨서도 머리맡의 대본을 들여다봤고 화장실에 갈 때도 대본을 놓지 않았다.

서울 대학로 연습실에서는 연습 시간 내내 꼿꼿하게 서서 아들 잃은 엄마가 되는 연습을 반복했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매일 좁은 연습실에서 감정을 폭발시키고 나면 손끝부터 발끝까지 피곤해졌다. 그래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50년간 관객들이 심어준 신뢰를 조금도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은퇴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무대에 선 지 50주년이 되는 내년 멋지게 은퇴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나 이제 할 만큼 했다며 내 마음대로 그만두는 거, 되게 건방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새로 만나는 관객들은 나를 이제 은퇴해도 무방한 배우로 보지 않아요. 어떤 관객에게는 나는 그냥 연기하는 모습을 실제로 처음 본 배우일 뿐이더라고요. 얼마나 건방진 생각을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올해 그가 사투를 벌이며 무대에 올린 작품은 이번 모노드라마를 포함해 4편. 9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보다, 젊은 시절보다 더 쉬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매일 오전 라디오 생방송을 하루 두 시간씩 진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크지 않으면서도 명확하고, 진심을 가득 담은 손숙 특유의 목소리가 전국에 퍼지고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공연장에서는 감정을 그러모아 연기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 활동이 곧 운동이며 휴식

하루도 쉬지 않는, 20, 30대 젊은이들조차 버텨낼 수 없을 법한 삶이지만 손숙은 은퇴해 취미 생활을 즐기는 동년배보다, 열 살 혹은 스무 살 어린 누군가보다 건강하다. 매일 아침 6시면 일어나 방송국으로 오는, 쉴 틈 없는 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맑은 빛이 감돌고 몸은 군살 하나 없이 날렵하다. 후배 배우들과 스태프를 대하는 모습에서는 유쾌한 에너지와 웃음이 넘친다.

“운동은 안 해요. 저한테는 활동이 곧 운동인데 따로 운동을 할 필요가 없죠.” 손숙의 말처럼 그에게 활동은 곧 운동이고 휴식이며 정신 건강 유지 비법이다.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극의 시대적 배경을 끊임없이 공부한다. 가지 못한 세상, 살지 못한 인생을 체험하고 배우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일주일에 2, 3권 이상의 책을 꼭 본다.

다양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배우의 머릿속은 10대 못지않은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하루 300마디의 대사를 외우는 그의 뇌는 수험생의 뇌처럼 쉴 틈 없이 움직인다. 온몸과 온 정신을 쏟아내며 연기하고 나면 몸은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건강해진다. 그래서 그에게 “활동하지 말고 쉬라”는 말이나 “은퇴하라”는 말은 운동하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대사를 할 수 없을 때까지 무대에 오를 겁니다. 그저 배경처럼 서 있어야 하는 단역일지라도 의미 있는 역할이라면, 활동할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나이가 들수록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 손녀와의 불편한 동거? 행복한 동거!… 재능 그대로 물려받은 손녀 조민지 양 ▼

“이놈아, TV도 안 끄고 만날 그렇게 자면 어떡해? 아주 너 때문에 못살겠다.” 한참 잔소리를 끝낸 뒤 전화를 끊은 손숙의 입술에 “사실은 너 때문에 살겠다”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가 번진다.

대배우의 얼굴에 평범한 ‘할머니 미소’가 피어나게 한 사람, 어느 날 그의 인생에 홀연히 나타난 손녀 조민지 양(19)이다.

세 살 때 호주로 이민 가는 바람에 10번도 채 만나지 못했던 민지는 7월 한국에 와 할머니와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민지는 할머니가 50년간 걸어온 길을 자신도 걷겠다고 했다. 기특하게도 한국 뮤지컬 ‘미남이시네요’의 수녀 클러버 역에 캐스팅돼 연습을 하러 온 차였다.

뮤지컬이 좋아 호주의 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학교 행사 때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하더라는 이야기를 손숙은 종종 들어왔다. 그는 “세 딸들도 배우를 꿈꾼 적이 없었는데 맏손녀가 그 길을 걷겠다며 내 곁에 왔을 때 뭔가 묘했다”고 했다.

지난달 7일 손녀가 생애 첫 공식 무대에 오르던 날. 손숙의 가슴은 1963년 5월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쿵쾅거렸다.

당시 연극 ‘삼각모자’의 여주인공을 맡아 생애 첫 무대에 올랐지만 긴장한 탓에 첫 대사를 입에서 떼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관록의 대배우가 된 그는 이제 좀처럼 떠는 법이 없지만 손녀의 첫 무대를 보러 온 이날만큼은 오래전 그날처럼 떨었다.

그러나 손녀는 첫 무대만큼은 할머니의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무대에 이제야 올랐다는 듯 신이 나서 무대를 가로질렀다. 손숙은 여느 할머니처럼 “첫 무대를 즐긴다는 건 쉽지 않다. 내 손녀지만 정말 가능성이 뛰어나더라”라며 자랑을 쏟아냈다.

손숙과 민지는 각자 공연을 하며 2개월째 동거 중이다. 세 딸은 모두 호주로 이민을 갔고, 남편과도 이혼해 그는 직접 열쇠로 문을 따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은 민지가 가끔 안에서 문을 열어준다. 10여 년 만에 겪는 낯선 일이다.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이지만 50년 세월의 간극이 주는 세대 차이는 있다. 민지가 샤워를 하고 나온 목욕탕에는 긴 머리카락이 널려 있고 새벽녘 거실로 나가 보면 끄지 않은 TV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뭔가를 정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손녀와 완벽하리만치 정갈한 할머니의 세대 차이는 소소한 투닥거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는 “솔직히 불편하다”면서도 “불편함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아 잔소리를 하고 걱정을 한다는 것, 누군가 집에서 왔다 갔다 한다는 것… 참 오랜만이었어요. 그 애의 머리카락을 줍고 작은 걱정들을 하면서 살아있다는 걸 느껴요. ‘불편한 행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민지는 12월이면 돌아간다. 조금 불편하지만 손녀와 함께여서 행복할 날도 3개월여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민지의 공연이 끝나면 집 치우는 법을 가르치려고 벼르고 있다”면서도 손녀의 마지막 공연이 있는 9일 어린 배우에게 뭘 해줄지 ‘할머니 미소’를 머금은 채 고민하고 있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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