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中방문 직후 서울 온 키신저… 박정희 만나 대북전략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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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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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北도발 반격땐 평양 아닌 원산까지만”■ 美 기밀해제 문건 공개

1973년 11월 16일 한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동아일보DB ☞ 故 박정희 전 대통령 희귀사진 공개
1973년 11월 16일 한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동아일보DB
☞ 故 박정희 전 대통령 희귀사진 공개
“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의 교훈은 (남한이) 북한의 도발에 맞서 반격할 경우 국제정치 환경은 (강원도) 원산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있겠지만 평양까지 얻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1973년 11월 16일. 청와대를 예방한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중동 문제를 화두로 올리며 북한의 도발 위협을 우려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이같이 조언했다. 유엔은 무력으로 확장한 영토를 승인하기보다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데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 세력균형에 입각한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대가이기도 한 키신저는 “닉슨 행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는 한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전쟁 발발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로 되돌릴 수 있는 강력한 지원을 계속 제공할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이 같은 내용은 27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당시 박 전 대통령과 키신저 장관의 대화록(1급 비밀)을 통해 밝혀졌다. 국무부는 최근 동북아 및 동남아 관련 비밀문건(1973∼1976년)을 비밀 해제했다. 한반도 관련 문건 61점도 포함됐다.

키신저 전 장관의 방한은 한국에는 사전에 알리지 않은 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만난 직후 이뤄진 것이었다. 22년 만의 한국 방문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뜻밖에 중동 문제를 화제로 올렸다. 그해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시나이 반도 및 골란 고원 기습공격을 상기시킨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이 한반도에서도 똑같은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키신저 장관의 견해를 구했다. 키신저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이 이뤄진 직후 미국의 전략은 소련의 무기 지원을 받는 쪽은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1973년 8월 24일자로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백악관으로 보낸 전문에서 “박 대통령은 북한이 이 같은 만남(베이징 북-미 접촉)을 외부로 공개해 ‘미국이 한국 정부를 제치고 북한과 직거래를 한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중국이 한국과 직접 면담을 하기 전에 북-미 2차 접촉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 한국의 요구”라고 했다.

1973년 7월 25일자 문건은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미국의 지원 관련 내용을 담았다.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이 비밀문건은 “현재 한국 지상군의 능력은 북한에 비해 50% 이상 크지만 한국 공군 방위력은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해 1월 16일자 국가안보회의(NSC) 문건은 하비브 대사가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1974년부터 주한미군의 수를 감축하기 시작해 1976년까지 지상군 철수를 완료해야 한다는 제안서가 접수됐음을 보여준다.

27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대화록 일부.
27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대화록 일부.
국무부 내부회의(1974년 1월 28일)에서 한국 관련 브리핑에 나선 하비브 대사는 “한국의 국내 사정이 미국의 국익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한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 강화는 내부의 저항을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열강들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럴수록 한국 사회에 대한 공고한 통제를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비브 대사는 키신저 장관에게 “미국이 공개적으로 아무런 비난을 하지 않았지만 기회가 되면 적당히 조언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키신저 장관은 “내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며 “우리가 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했다. 키신저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투자할 가치는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대화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개입 축소’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이어진다. 하비브는 “우리가 한국에 가진 국익에 비해 지나치게 개입돼 있으며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망할 놈(damn)의 정치 책동에 자동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키신저는 즉각 “주한미군의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주저 없이 답한 하비브는 “나라면 언제 어떻게 그 카드(주한미군 감축 및 철수)를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령 4만2000명 중 2년 안에 2만 명의 주한미군을 감축할 경우 한국 국내 정치에 대한 개입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키신저의 질문에도 “예스”라고 답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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