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에듀투어]영남유생들의 한양길··· 가파른 고개에 과거열정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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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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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조선시대 한양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높고 험했던 문경새재. 사진은 문경새재길 세 관문 중 첫 관문인 ‘주흘관’의 모습.
조선시대 한양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높고 험했던 문경새재. 사진은 문경새재길 세 관문 중 첫 관문인 ‘주흘관’의 모습.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한양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높고도 험한 고개다. 얼마나 넘기 어려운 고개였기에 전라도 진도 사람들이 부르는 아리랑에도 등장했을까. 문경새재길은 영남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청운의 꿈을 안고 올랐던 길이자 봇짐을 짊어진 보부상들의 땀이 밴 길이다.

문경새재길을 걸으면서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다시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초등 사회교과 ‘우리 국토의 모습과 생활’(6학년), ‘여러 지역의 생활’(4학년), ‘이동과 의사소통’(3학년)은 물론이고 중학교 사회교과 ‘내가 사는 세계’(1학년)와 연계 학습할 수 있는 체험학습 여행지다.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문경새재. ‘새재’에는 하늘재와 이우릿재 사이에 있는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로 난 고개라는 뜻도 있다.

선비상을 지나니 옛길박물관이 나왔다. 옛 사람들이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도로별 거리를 알려주는 책자, 문경새재와 우리나라 고개에 관한 자료, 신분증인 ‘호패’를 비롯해 나침반, 해시계 등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예요?” 훈이가 조선시대 주요 도로가 그려진 전시대 앞에서 물었다.

“저기 가운데 한양에서 오른쪽 아래 동래로 내려오는 길이 있지? 그리고 그 중간에 통영으로 내려오는 갈림길이 보이지. 저 근처야.”

○ 역사 속 문경새재의 모습은?

“엄마, 여기 좀 보세요.”

양반이 앞장서고 노새를 끄는 하인, 그리고 등에 짐을 진 보상이 그 뒤를 이어 가파른 산허리를 돌아가고 있다. 영남대로에 있는 ‘토끼비리’ 길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남하하다 길이 막혔을 때 마침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따라가 찾아낸 벼랑길이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한 ‘토끼비리’는 명승 31호이기도 하다.

박물관을 나서니 저 멀리 주흘관(主屹關)이 양팔을 벌려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새재길 첫 관문이다. 성벽에는 깃발이 펄럭인다. 이 길목만 잘 지켰어도 임진왜란 때 왜적이 쉽게 서울을 공략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성문 앞에는 청나라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말을 탄 채 오가고 있었다. 주흘관 주변은 우뚝 솟은 산과 성벽이 있어 사극 촬영의 최적지로 꼽힌다. 개울 건너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촬영장이 있다. 드라마 ‘대조영’ ‘태조 왕건’ 등을 찍은 곳이다.

임진년 1592년. 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조정에서는 왜군을 막아내려고 신립 장군을 문경새재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신립 장군은 문경새재는 지세가 좋지 않으니 왜병을 넓은 들판으로 끌어내 무찌르겠다며 충북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 부대는 왜군에 대패했고 신립 장군은 강에 빠져죽었다. 조정은 임진왜란 후 이곳에 주흘관을 비롯해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 등 관문 3개(사적 147호)를 설치해 요새로 삼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다.

○ 고개에 서면 희망이 보이는 이유

주흘관을 지나 두 번째 관문인 조곡관까지 거리는 3km.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길에 물소리가 시원했다. 조령원 터는 국립여관인 조령원이 있던 자리. 안으로 들어서니 허름한 초막만 덩그러니 있다. 오가는 행인이 별로 없던 시절, 밤길 걷다가 불빛이라도 발견하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이곳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이전 토기조각과 고려시대 유물은 이 길이 일찍부터 통행로로 이용됐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 산불을 막기 위해 돌멩이에 한글로 ‘산불됴심’이라고 적었다는 비가 눈길을 끈다.

“옛날에는 조심이 아니라 ‘됴심’이었어. 언어도, 고개도 세월이 흐르면 바뀌는 거야.”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 조곡관이다. 조곡관에서 올라온 길을 살펴보니 오른쪽으로 첩첩 산이다.

“조령관까지 3.5km를 더 가야 한다는데 큰일 났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났어요.”

“살다 보면 고개를 만나게 되어 있어. 힘들다고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어? 고개를 넘으면 새 세상이 펼쳐지잖아. 힘들어도 넘어야지. 우리 조상들이 아리랑고개, 보릿고개를 잘 넘어왔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처럼.”

○ 과거길 오르던 유생들, 문경새재를 주로 이용한 까닭은?

산길 경사가 급해졌다. 시가 있는 옛길, 장원급제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길이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로 다 나간다’는 문경새재 아리랑비를 지나고 책바위를 지나 마침내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했다. 이쪽은 경상도, 저쪽은 충청도다.

“퀴즈 하나 낼까? 우리가 영남이라고 할 때 영남은 어느 곳을 기준으로 하는지 아니?”

“새재가 기준이겠죠.”

“맞아. 영남은 새재 또는 인근의 하늘재 남쪽에 있는 상주, 문경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대. 그러다 오늘날에는 경상도 전역을 말하는 용어가 됐어.”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은 문경새재 외에도 죽령(충북 단양∼경북 풍기), 추풍령(충북 영동∼경북 김천)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길 유생들은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말 때문에 문경새재를 주로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염원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곳 이름 문경(聞慶)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문경새재는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들어서고 1925년 인근 남쪽 이우릿재(이화령)에 신작로가 생기면서 쇠퇴 길로 들어서 옛길이 되고 말았다. “문경새재길은 관광지로 다시 부활했으니 다행이에요.”

“교통통신용으로 요긴했던 옛길 중 남은 길이 별로 없잖아. 쓰임새가 있는 것만 남는 거야. 길도 예외는 아니겠지.”

조옥남 ‘특목고, 명문대 보낸 엄마들의 자녀교육’ 공동저자
옛길-조상의 삶 만나는 문경새재 체험 포인트!


▷교과와 연계된 체험활동 목표

-옛날의 이동수단 알아보기

-새재길이 생기게 된 배경 알아보기

-새재길을 통해 조상들의 생활모습 이해하기

▷자녀와 부모가 함께할 만한 추천활동


-새재길 걸으며 선비의 호연지기 느껴보기

-새재 3개 관문의 문화적 가치 살펴보기

-고갯길을 걸으면서 옛사람들이 무슨 노래를 했을지 상상하기

-교통수단 발달이 고갯길에 미친 영향 살펴보기

▷+α 탐구활동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과 새재에 얽힌 이야기 살펴보기

-드라마 촬영장이 주흘관 근처에 자리 잡게 된 이유 알아보기

-우리나라 여러 고개에 깃든 전설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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