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장 대신 F학점 달라” 일부러 ‘낙제’까지

  • 입력 2009년 2월 4일 03시 01분


취업난에 졸업 미루는‘NG족’

올 대졸자 55만명 쏟아져 구직 별따기

재학생 신분 유지한 채 인턴 등 ‘우회’

취직 늦어져 사회 ‘젊은 피’ 부족 우려

《“‘무늬만 대학생’이라는 건 저도 알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올 2월 졸업을 앞두고 있던 지방대생 박모(26) 씨는 8월로 졸업을 미뤘다. 제어자동차공학과를 다니며 토익 점수를 900점까지 올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그는 “100개가 넘는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보냈지만 면접을 볼 수 있었던 곳은 고작 7군데에 불과했다”며 “영어회화 공부는 물론이고 취업 스터디까지 해가며 이력서와 모의면접을 준비하고 있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3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올해 취업시장에 뛰어들 대학 졸업자는 55만6000명이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기업들이 채용 규모를 크게 줄이면서 취업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다.

예전에는 1, 2학년 때 학점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학생들이 학점을 올리려는 의도에서 재학 기간을 늘리곤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스펙(spec·취업에 유리한 조건)’ 경쟁이 벌어지면서 토익, 해외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 등 이른바 ‘취업 5종 세트’를 갖추기 위해 휴학을 하는 ‘5년차 대학생’이 쏟아졌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이걸로도 모자라 ‘6년차 대학생’까지 양산하고 있다.

이들이 졸업을 연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졸업예정자라는 신분이 취업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은 “졸업예정자와 취업재수생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학생들은 믿지 않는다.

졸업을 연기하고 인턴 응모를 준비하고 있는 김모(27) 씨는 “기업은 인턴을 뽑을 때도 대학생이나 휴학생을 원하지 대졸자에겐 눈길을 주지 않는다”며 “취업에 실패했는데 대책 없이 학교를 떠나는 것은 미취업자에게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다른 혜택도 있다. 도서관 등 학교 시설도 이용하고, 기숙사 신청도 할 수 있다. 졸업연기자가 늘면서 요즘 대학가에서는 기숙사 입주난이 벌어질 정도다. 하지만 졸업생이 되면 도서관에서 책 한 권 빌리기조차 쉽지 않다.

학교 공부가 목적이 아니다 보니 졸업예정자들은 수업을 하루에 몰아서 듣고 나머지 시간은 또 다른 스펙을 갖추는 데 투자한다. 김 씨도 학교에 가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금요일 오후 4시부터 3시간을 연이어 들을 수 있는 과목을 신청했다.

졸업연기제가 없는 학교의 4학년 학생들은 일부러 졸업필수 과목에서 F학점을 받기도 한다.

올해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반인 김모(24) 씨는 고심 끝에 학교에 토익점수를 제출하지 않기로 했다. 졸업인증제에 필요한 토익점수를 제출하지 않으면 졸업에 필요한 140학점을 다 들어도 졸업이 되지 않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방식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추가로 낼 필요도 없고,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 취업 준비에 ‘다걸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청년층의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교육개발원 최상덕 인재평생교육연구실장은 “청년들의 구직 기간이 장기화돼 사회 진출이 늦어지면 사회 전반적으로 활력이 떨어진다”며 “대기업 노조처럼 조직화돼 있지 않아 이익집단으로서 목소리도 못 내는 청년들에게 사회 차원의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이창혁(25·KAIST 수리과학과 4학년), 심성미(23·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표윤신(23·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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