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e TOWN]지식은 곧 객관적 판단… 정보를 체계화하자

  • 입력 2008년 3월 31일 02시 57분


■ 내면화된 앎이란?

“지식이란 정신이 어떤 대상을 아는 작용 및 이 작용에 의하여 알려진 내용을 말한다. 광의로는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실제적·경험적 인식을 뜻하고, 엄밀한 뜻으로는 원리적·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를 말한다.”

이 정의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핵심은 지식에는 객관적 판단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때 지식이란 판단의 개념을 포괄한다. 우리가 말하는 지식인이나 지성인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란 논의와 연결된다. 지식은 사고와 판단, 그 판단에 이은 실천을 내포하고 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란 지식인 또는 인격자의 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배운 지식이 판단으로 발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단순한 정보에 불과한 지식을 아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즉, 정보를 체계화하여 사고하고 결정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쓸모없는 내용을 아는 데 그친 것이다.

판단과 실천이 이뤄지지 않는 현상은 정보를 체계화하여 판단하고 실천하게 하는 사고 내면화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고 내면화는 교육 과정에서 별도의 시간으로 가르칠 수 없다. 대인 관계, 업무, 정부 정책 등은 모두 심층적인 다각도의 사고 작용과 판단을 필요로 한다.

대학교육을 마친 대부분의 사람도 수많은 정보의 파고 속에서 중요한 판단을 할 때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쓸모없다고 느낀다. 교과와 논술 학습 어디에도 이런 사고나 판단의 여지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고정 관념과 정서적 경험에 의존하는 이유다. 부모와 친구로부터 배우는 인간에 대한 편견, 지역 감정, 정치적 불만 등의 비합리적 사고는 정보만 있고 사고의 기회가 없는 삶에서 초래된다.

하나의 예로 교통질서, 특히 횡단보도 질서는 초등학생 단계에서는 잘 지키다가도 나이가 들면 점차 지키지 않는다. 이를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은 우리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렸다’고 비판하면 ‘당신이 뭔데?’라고 반발하거나 ‘급해서…’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합리화나 반발은 소위 인지적 부조화 또는 인지 불일치라고 하는 ‘기존의 태도와 상반된 행위의 부조화를 불편하게 느낀 결과’이다.

정서, 내면화를 위한 조건

내면화된 앎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는 사고학습 과정에서 정의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의사결정과 관련된 인지과정들은 정의적 요인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문제 상황에서의 적극적 도전, 타인과 사회적 현실의 관여, 행위의 자발성, 비판적 사고 등은 사고와 실천에 영향을 주는 정의적인 측면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가 탈옥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앎이 신념화되어 ‘옳은 행동’을 지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정의적 차원은 앎과 행위를 연결하는 다리에 해당한다. 확신에 근거해서 자발적으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지식과 감정을 통합하는 구성요소가 되며 인격과 동시에 비판적 사고의 성찰을 증진시킨다.

흔히 우리가 아는 성실, 정직, 용기, 신실, 진실 등과 같은 용어들이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실행될 때 덕(德)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개인들은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전제가 있다. 이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너는 잊어버리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네가 책임을 지게 되는 거야. 너는 네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그렇다면 대입이나 로스쿨을 준비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이 자기의 문제 상황에서 다양한 사고와 실천의 일관성(끈기)을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앎에 대해 집중하거나 헌신하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앎에 대한 신념 조건을 형성해 주는 것이다. 앎이 신념 조건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부모, 교사, 직장 상사, CEO 모두 객관적 지식의 전달 과정에서 보이는 각자가 느낀 감정, 포용, 상호 작용 태도 등의 정의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사나 강사가 어려운 전문 지식과 배경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어조와 몸짓조차도 그 어려운 지식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와 수반(隨伴)해서 자녀, 학생, 부하에게 그들의 자율적 선택에 근거한 책임을 스스로 지도록 하면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의 인격이 성장하고 동시에 사고력 함양으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정서 문제, 내면화된 앎으로 해결

‘왜 많은 어린이는 코피가 나면 엉엉 울까?’ 현상적 관점에서의 답은 ‘코피 때문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엇이 울게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아이가 코가 깨져 그 고통 때문에 울 수 있고, 단순히 넘어진 게 분해서 울 수도 있으며, 또 혼자 길을 가다가 다쳤다면 외롭고 두려워서 울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제시된 질문에 따르면 비약이다. 아이가 외로움과 고독 때문에 울었다고 답을 한다면,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조건을 가정한 비약이다. 역시 넘어진 상황에서의 ‘엄청난 고통’ 때문에 울었다고 해도 통계적 가정이 간섭하여 비약으로 비판된다. 게다가 ‘혼자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 코피가 났기 때문에’라고 논리적으로 답을 한다고 해도 표면적인 답변이라는 비판을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른 질문을 추가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어른도 코피가 나면 우는가? 물론 어른도 고통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정서적인 동인에 의해 ‘엉엉’ 우는 어른이 있을까? 해당 사례에서 중요한 점은 어른은 코피가 나도 정서적으로 크게 울지 않으며, 그 이유는 코피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코피와 어른의 ‘사고 조작’은 상관성 있는 질문으로 코피와 아이의 울음에 대한 일반화된 원리를 추론하는 가치를 지닌다. 아이들에게 코피란 고통 이면에 정서적인 두려움의 대상이다. 어른은 코피에 대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울 이유가 없다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거나 울 정도로 정서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무의식중에 일반화한다. 물론 여기에는 상식적으로 ‘코피는 충격에 의해 혈관이 터져서 나오는 혈액’이라는 생리학적 지식도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에게는 이런 일반화를 위한 경험과 앎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 또는 싸움의 결과가 신체적 능력과 의지에 기인한다고 가정할 때, 아이들은 싸우는 도중에 한 아이가 코피가 났기 때문에 승부가 났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전제한 ‘싸움의 결과 판단’이라는 앎은 무용하다. 아이들의 싸움이 정서적 분노와 미움에서 나왔음에도 그 정서적 분출이 코피로 종결되는 상황은 합리적인 과정이 아니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는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에는 이미 모종의 원리가 숨어 있다. 그것은 울음이 초래되는 인간의 정서적인 슬픔이나 두려움 등은 일반화된 상태에서 어느 정도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코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어린아이의 울음처럼 대입, 로스쿨, 직무 학습에도 무지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 두려움은 배경 지식을 일반화된 관점으로 만들었을 때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관점 일반화가 없다면 표면적으로 주어진 모종의 텍스트에 정서적 몰입을 할 수밖에 없다.

권구현 엘림에듀 CTI 연구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