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만 해라” 무거운 짐에 어린 마음 멍들고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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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서울 강남 지역의 한 소아청소년정신과 병원. 엄마와 함께 온 아이 10여 명이 상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 차림의 중학생도 눈에 띄었다. 상담을 받으려면 예약이 필수다. 초진 환자는 3일∼1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이 병원 주변에 있는 다른 병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알게 모르게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청소년이 적지 않다. 많은 청소년이 ‘학업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들은 “아이를 뱄을 때부터 태교에 신경을 쓰는 등 교육에 다걸기(올인)하는 학부모의 교육열이 자녀에게 엄청난 학업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면서 “아이들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마음의 문을 닫거나 폭력성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12∼18세 청소년 863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아동 및 청소년의 건강 수준 및 보건의식 행태’에 따르면 학업 문제(67%)가 스트레스 원인 1위로 꼽혔다. 이어 진로 문제(13.8%), 가정 문제(6%), 친구 문제(5.7%) 등의 순이었다.

사교육 열풍이 심한 서울 강남 지역에는 소아청소년정신과 병의원이 많다. 3월 현재 ‘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에 등록된 회원을 살펴보면 서울시 소재 73개 소아정신과 가운데 41%인 30개가 강남, 서초구에 몰려 있다. 의원급 50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4개가 이들 2개 구에 있다. 한 학원 밀집지역에는 소아청소년정신과나 학습치료 클리닉이 길 하나 건너 하나씩 있을 정도다.

서모(17) 군도 학업 스트레스로 병원을 찾았다. 그는 성적이 상위권인 여동생과 비교되곤 했다. 서 군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공부에 손을 떼겠으니 나에 대한 기대를 접으라”고 부모에게 선언했다.

서 군은 의사에게 “방에서 과외공부를 받다 거실에서 부모님과 동생의 웃음소리를 듣고 ‘다들 저렇게 행복한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공부를 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특수목적고에 입학한 이모 양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혼자서 산책하거나 음악을 듣는다든지, 혼자 우는 식으로 해소했다. 부모는 성적에 변화가 없자 딸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이 양은 점차 가족과 대화를 끊었고 결국 휴학했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들은 “아이들은 학업 스트레스를 받아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다 나가떨어지기 일쑤”라며 “분노나 좌절을 타인에게 풀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푸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인 셈”이라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혼자 해결하려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푸는 아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아이들 가운데는 ‘세상에 있는 모든 학원을 불질러 버리고 싶다’거나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모두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세상을 향한 극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업 스트레스는 은둔 또는 부모에 대한 폭력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스트레스가 병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둔 정모(15) 군은 평소 집에서 최소한의 말 이외에는 가족과 대화를 일절 하지 않고 자기 방에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먼 산만 바라보거나 컴퓨터 게임에 빠졌다.

밤에 가족이 모두 잘 때 외출하고 낮에 집에 있을 때는 친구의 전화도 받지 않던 정 군은 엄마에게 짜증을 내다가 급기야 심하게 욕을 하며 엄마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기까지 해 상담소를 찾았다.

어머니 김모(44) 씨는 “아이가 닫고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면 한숨만 나올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제 아이 이름만 들어도 눈물부터 나온다”며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아이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의 상당 부분이 부모에게 있지만 부모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마음누리 정신과’ 정찬호 원장은 “부모들은 아이의 학교나 선생님, 친구와의 갈등이 문제인 줄만 알았다가 정작 자신이 자녀의 스트레스 제공자로 지목되면 많이 당황한다”고 말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중산층에 속한 전문직일수록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주는 경향이 있다.

‘생각과 느낌’의 손성은 원장은 “상담받는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전문직으로 성공한 중산층 이상으로 한결같이 자식도 자신처럼 전문직을 갖길 원하고 교육을 성공의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며 “아이를 자기 자존심의 결과물로 바라보다 보니 아이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 경우 아이들은 자신의 학업 스트레스를 부모에게 호소해 봤자 핀잔만 듣고 상황만 악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대화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 한국청소년상담원이 2003년 중고교생 154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부모와 대화할 때 “내가 예전에 잘못한 것까지 다시 얘기하신다”(45.5%), “내 이야기는 듣지 않고 부모님 말씀만 하신다”(30.7%), “부모님과 나는 서로에게 잘못이 있다고 다투게 된다”(28.3%), “내가 대화하지 않으려고 한다”(27.1%), “부모님이 겉으로 말씀하시는 것과 속마음은 다르다”(26.1%·중복 답변)라고 대답했다.

공부 잘하고 멀쩡해 보이던 아이가 늘 불만에 차 있을 때가 많으면 일탈에 빠지는 징후로 봐야 한다. 한마디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짜증, 분노. 은둔 등으로 ‘내가 지금 힘들다’는 신호를 보낸다. 부모들은 이런 징후를 잘 포착해야 한다.

김창기소아정신과 김창기 원장은 “아이들을 공부로만 내몰아서는 부모 자식 관계는 물론 공부마저 못 건지는 경우가 많다”며 “명문 학교만 바라보며 아이가 버거워하는 서너 단계 위를 강요하기보다는 아이가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 학업 스트레스 줄이려면

최근 심리학계의 많은 연구 결과는 감정 또는 정서가 개인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요소이며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주춧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정서발달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유아기와 아동기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부모와 눈 맞춤을 교환하고 애정을 확인해야 하는 유아기 때부터 요즘 엄마들은 아이와 감성적인 교류를 하려고 하기보다 남보다 하나라도 뭔가를 일찍 가르쳐 주려는 ‘영재’ 교육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며 “학습 능력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컴퓨터와 공부에만 매달리면 아이의 정서 발달을 키워 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길병원 소아정신과 조인희 교수는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서능력이다. 아이들이 갖는 기본적인 애정 욕구와 자유롭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짜증이 늘거나 쉽게 산만해지고, 집이나 학교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 교수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좌절에 대한 인내심도 떨어져 어렵거나 힘든 고비에서 쉽게 좌절하고, 적극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기 어려워 집중력과 과제 수행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요즘 아이들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학습의 주체가 되기보다 과다한 스트레스 속에 놓여 있다 보니 자신만의 자유를 찾는 쉬운 방법으로 컴퓨터에 의존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연세대 김경희(심리학) 교수는 “전 사회에 팽배한 성적 제일주의가 낳은 정서교육 부재가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며 “가정에서부터 정서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다양한 감정을 소통하는 연습을 통해 정서가 발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은 정서가 세분화되지 못하고 감정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나이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이 시기에 타인과의 쌍방향 소통을 배우지 못하고 책이나 컴퓨터 같은 일방향 소통에만 빠져 들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마음을 헤아리는 정서교육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아이들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서 저녁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며 또 많은 양의 숙제를 해내면서 진정한 마음의 숙제는 풀지 못하고 계속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자신의 양육태도에 대해 지나친 자책감을 갖는 것도 좋지 않다. 아이의 증상이 정신적 문제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정신보건센터 이종하(학교정신보건사업담당) 팀장은 “우울증이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의 경우에서는 부모의 양육 문제와는 상관없이 폭력성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면서 “이는 약물과 행동치료 등을 병행해야 좋아진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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