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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4월 7일 11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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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 S병원 중환자실. 박일완(75·서울 강서구 가양동) 씨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의 볼을 쓰다듬으며 간절하게 호소한다. 남편의 염원이 통했을까. 아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린다. “응…, 응….” 가래 끓는 소리 같다. 박 씨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그래, 나야 나”라고 화답한다. 박 씨는 의사소통을 못해도 좋다. 아내의 입에서 소리만 나와 준다면. 아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난 몇 주일 의식불명 상태였다.
“아내를 생각하면 하루 두 끼 먹는 것도 미안해”
6일 오후 병원에서 만난 박 씨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을 힘겹게 끄집어냈다.
“이젠 틀렸나봐. 가망이 없는 것 같아.”
박 씨는 1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내 곁을 지켜오고 있다. 아내 홍정이(70) 씨는 식물인간 상태다.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홍 씨는 1997년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을 땐 이미 전신마비 상태였고, 뇌 조직도 서서히 죽어갔다. 그날 이후, 아내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박 씨는 10년을 한결같이 정성껏 아내를 돌봤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아내가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러나 아내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빚만 불어났다. 병원비가 만만찮았던 것이다.
박 씨는 기초생활수급권자다. 매달 정부에서 70만 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그 중 50만 원은 아내의 병원비에, 10여만 원은 병원비 지불을 위해 그간 대출받은 카드빚의 이자를 갚는데 쓴다. 세금을 내고나면 남는 게 없다. 그래도 박 씨는 오로지 아내 생각뿐이다.
“난 괜찮아. 하루 두 끼만 먹어도 돼. 이웃 아주머니들께서 반찬 같은 것도 챙겨줘. 하지만 아내는 아무것도 못 먹어. 코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희멀건 물만 먹을 뿐이야. 그런 아내 생각하면 먹는 것도 미안해.”
“아내를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
박 씨는 실향민이다. 고향이 북한의 개성이다. 열아홉 살 나던 해 6·25 전쟁이 일어나 홀로 남으로 내려왔다.
“북한에 부모님이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 돌아가셨을 거야. 살아계신다면 120살이 넘었을 테니….”
월남 후 박 씨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의지할 곳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건설현장의 막일뿐 이었다. 일거리가 있는 곳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서울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박 씨 나이 서른 살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아내를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 수줍게 웃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도 오롯해.”
박 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아내와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나 보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까진 아무리 아파도 참아야지”
박 씨에겐 딸이 한 명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딸이 간혹 병원을 찾아와 아내 간병을 거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기대할 수 없다. 딸도 당뇨가 심해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박 씨의 병이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각장애 4급이다. 갈수록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심장도 좋지 않아 오래 걷지를 못한다. 언제 심장이 조여질지 몰라 늘 약을 챙겨 다닌다. 병원에선 박 씨에게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단다.
“돈도 없지만 결과가 안 좋게 나올까봐 병원을 못 가겠어. 두려워. 수술 받다가 잘못돼봐. 어떻게 되겠어. 아내는 나 말고 보살펴줄 사람이 없어. 아내가 살아 있을 때까진 아무리 아파도 참아야지.”
박 씨는 앞으로 시력을 잃게 돼 아내를 보지 못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고도 했다.
“시력이 나빠져서 큰일이야. 갈수록 사물의 형체가 흐릿해져. 이러다가 곧 시력을 잃겠지. 잘 때마다 기도해. 아내 얼굴을 계속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게 안 된다면 마지막 가는 모습까지만 지켜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병원을 옮겨야 해. 열흘에 한번쯤 아내를 보게 될 것 같아 안타까워”
박 씨에겐 요즘 근심이 또 하나 늘었다. 이달 10일 병원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 측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통보해온 이상 도리가 없다.
“돈 때문이야. 지금 이 병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야 50만 원이 엄청 큰돈이지만 가진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겠지. 웃돈을 주고서라도 들어오려고 하겠지.”
몸이 불편한 박 씨가 꼬박꼬박 아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지금의 병원이 다른 곳보다는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내가 새로 옮겨갈 병원은 서울 강동구 길동의 S병원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3시간 넘는 거리를 매일 왕복하기란 사실상 무리다. 박 씨는 “병원을 옮기게 되면 열흘에 한번쯤 아내를 보게 될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병원 관계자는 “병원비 문제도 있고, 오래 있기도 했고…. 그러나 환자의 상태를 봐가면서 옮길 거다. 환자의 상태가 나쁘면 옮기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정말 아내가 건강해지면 꼭 결혼식 올려주고 싶어”
최근 홍 씨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박 씨가 찾아올 때면 웅얼거리던 말마저 잘하지 못한다. 병원 관계자도 “현재로선 상태가 나이질 가망은 전혀 없다”고 진단했다.
“제일 마음이 아픈 건 아내가 10년간 누워만 있다가 저 세상으로 가는 거야. 단 한 번만이라도 일어나서 활달하게 걷다가 눈을 감았으면…. 그러면 적어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진 않을 텐데….”
인터뷰 내내 박 씨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 10여년 아내 곁에서 눈물로 지새웠으면 마를 법도 하건만, 박 씨는 아내만 보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벅차올라 눈물이 저절로 나온단다.
“아내에게 못해준 게 너무 많아. 그 중 가장 후회되는 게 남들 다 하는 결혼식도 못 올려줬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거야. 정말 아내가 다시 건강해진다면 꼭 결혼식도 올려주고, 가까운 지방에라도 함께 여행 다녀오고 싶어.”
박 씨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울음을 참으며 잠든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 씨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아내의 얼굴로 떨어졌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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