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어느 무거운 선택에 부쳐

  • 입력 2007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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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에서 30대를 보냈다. 등록금을 내지 않는 사범대에는 어려운 학생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때 연을 맺은 졸업생이 외교관이 됐다. 영어 교사로 근무하면서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외국 근무 후 귀국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무부에서 일한다고 했다. ‘고향에서 원님 노릇 하는 것 보는 게 소원’이란 부친의 성화를 거역하지 못해 부처를 옮겼다고 그는 실토했다. 재주 있고 성실한 이 입지전의 인물은 지금 수도권에서 시장으로 일한다. 지방 출신인 그는 벌써 오래 전에 부친의 소원을 상회하는 큰 고을 원이 됐다.

위의 사례가 시사하듯이 청소년의 ‘장래 희망’이란 사실상 부모의 희망인 경우가 많다. 양쪽 희망 사항이 부합하지 않을 때 세대 갈등이 빚어지곤 한다. 사회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직업 수가 극히 한정된 전통사회에서 장래 희망은 다양할 수 없었다. 수혜층인 사대부에게 열려 있는 길은 유학 경전 및 시와 역사를 공부해서 출사(出仕)하는 일이었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과거의 가치관이나 습속이 일거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과거의 영대(永代)소유권’이란 말이 생겨났다. 사회이동이 활발하고 직업 수가 불어난 오늘에도 출사 욕구는 여전한 것 같다. 법과 지망자나 정치 지망자가 많은 현상이 한 징후다.

한은 총재 거절했던 정운찬 前총장

지금은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화시대다. 야심적인 장래 희망을 의탁할 찬란한 분야가 참으로 많다.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위해 필요한 전문 직종이 수두룩하다. 세분된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전문가가 배출돼야 선진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천연자원이 척박하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관광자원도 부실한 우리나라에서 의존할 것은 인적 자원뿐이다. 우수 전문가의 육성과 우수 전문 인력의 확보가 지속적으로 요청된다.

그런 맥락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거취에 대해 무심할 수가 없다. 그는 1998년 한국은행 총재직을 제의받고 사절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줬다. 당시 필자는 어느 신문 칼럼에 이렇게 적었다. “근래에 시원한 소식이 있었다. 어느 경제학 교수가 한은 총재직을 고사했다는 소식이다.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짤막한 거절 이유만이 보도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교직에 남아서 평생 연구에 종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데 그것만으로도 시원한 소식이요 경의에 값한다.” 필자의 경의는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정운찬 교수가 대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는 보도와 함께 의견이 여러 갈래로 개진된다. 그의 인품을 말하면서 ‘악마적 현실정치’에 투신할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고 정치적 무임승차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의견이 있다. 야당은 부패 정당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다는 그의 말을 거론하면서 그렇다면 선거에 임박해서 급조한 날림 정당으로 간단 말이냐, 결국 몰염치한 ‘정치 철새’ 도래지로 날아가 합류하는 행위가 아니냐며 걱정하는 의견이 있다.

역사의 근본적인 모호성, 인간 행위의 불가측성(不可測性), 이에 따른 정치의 비극을 얘기하면서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오이디푸스를 상기시켰다. 통치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이며 정치인은 어떤 경우에도 예측 못한 것을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항시 예측 못할 일이 있는 법이고 그래서 비극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설명이다. 정치인으로서 영광의 가능성을 수락할 때 그것은 동시에 오명의 위험성을 수락하는 일임을 정 교수가 모를 리 없다.

전문직 지망생 사기 꺾지 않았으면

주위의 강권으로 권좌에 오른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한 정치지도자가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절감하면서 사는 우리는 정 교수가 그런 역할을 못하란 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무거운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예의이다.

다만 연구에 전념하겠다는 그의 말에 감동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 선택이 연구에 종사하는 전문 직종 지망생의 사기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다. 장래 희망의 실질적 기획자인 학부모에게도 과거 회귀적 선택을 조장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것이 한갓 백면서생의 기우이기를 바란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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