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공판조서’ 확인땐 공판중심주의 흔들

  • 입력 2007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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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에버랜드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가 ‘검사의 공소장 변경 신청이 있었고 이를 허가했다’는 내용을 공판조서에 임의로 추가한 이유는 재판부가 원했던 공소장 변경의 근거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장 변경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지난 7년여 동안의 수사와 공판 기간 중 검찰은 일관된 주장을 펴 왔다.

사건의 핵심인 ‘전환사채(CB) 발행→주주들의 대량 실권→제3자(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 등) 재배정’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이 회장을 비롯한 그룹 차원의 승인 또는 묵인하에 이뤄졌다는 것.

1심 재판부는 이 같은 구도를 인정해 허태학, 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난해 8월 말까지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이상훈(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이 회장의 공모’ 부분을 명확히 입증하라고 검찰을 다그쳤다.

이후 법원 인사로 현재의 재판장인 조희대 부장판사가 심리를 맡게 됐고, ‘회사의 이사에게 지배권 변동을 막을 의무가 있느냐’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검찰은 이런 의무가 있음을 전제로 해 허, 박 씨가 지배권 변동을 막고 주주들에게 이 가능성을 고지할 의무를 어긴 것이 배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발행된 이후 주주들이 대량으로 실권해 지배권 변동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다만 이를 공소사실에 포함시키지 않고 지난해 12월 7일 결심공판 때 재판부에 ‘의견서’로만 냈다.

이 내용이 공소사실에 포함되면 주주들의 대량실권 뒤 이재용 씨 등이 인수자로 나선 것이 우연히 벌어진 상황이 된다. ‘모든 과정이 치밀한 각본에 따라 진행됐다’는 기존의 구도와 모순된다. 검찰로서는 자신들이 주장해 온 사건의 밑그림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부가 이 회장과 그룹 비서실의 공모 여부에 대해 명백한 유죄 입증이 어렵다는 점, 그렇다고 해서 무죄를 선고하기도 부담스럽다는 점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다 ‘공모’ 혐의를 비켜 가기 위해 공소장 변경을 추진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차치하고 더 심각한 문제는 법정에서 있지도 않은 일이 공판조서에 기록됐다는 의혹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년 취임 뒤 일관되게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해 왔다. 지난해 9월 대전지법과 광주지법을 방문해서는 “그동안 법원은 수사기관의 조서로 유무죄를 확정해 왔는데 검사들이 밀실에서 받은 조서가 어떻게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느냐”며 판사들을 질타했다.

이러한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공판조서의 진실성은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일부 변호사들은 “공판조서의 신뢰성이 무너진다면 공판중심주의는 거짓말중심주의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지방법원 순시 때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면서 “검찰 조서를 던져버려라”라고 했던 질타가 자칫하면 ‘공판조서를 던져버려라’라는 비난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의 파장은 예측하기 어려워 보인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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