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文史哲 입사원서부터 ‘홀대’

  • 입력 2006년 9월 25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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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대기업이 대졸 신입사원 채용 시 원서 접수 단계부터 철학, 사학, 국문학 등 인문학 전공자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본보가 10개 이상의 계열사에서 동시 채용을 하는 SK, 롯데, 한화, 두산, 금호아시아나, CJ 등 6개 그룹 계열사 113곳의 신입사원 채용공고를 분석한 결과 모집전공에 인문계열(외국어계열 제외)을 포함한 기업은 전체의 절반도 못 미치는 46개사(40.7%)에 불과했다.

나머지 67개 기업은 모집공고에 인문계열을 포함시키지 않은 채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 등을 우대한다고 밝혀 사실상 인문계열 구직자가 입사원서를 내는 것을 막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특정 계열을 우대한다고 해서 다른 계열 전공자가 입사원서를 아예 못 내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우대 계열 전공자만 모아 놓아도 경쟁률이 치열한 상황이라 인문계열 전공자가 불리한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차별받는 인문계열=그룹별로 살펴보면 롯데와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인문계열 차별이 가장 심했다. 롯데는 36개 계열사 가운데 6개사만이, 금호아시아나는 15개 계열사 중 2개사만이 모집전공에 인문계열을 포함시켰다.

SK는 15개사 중 6개사, CJ는 12개사 중 4개사만 인문계열 전공자를 뽑는다고 채용공고에 밝혔다.

한화는 21개사 중 17개사, 두산은 14개사 중 11개사가 인문계열을 모집전공에 표시해 두 그룹이 그나마 인문계열 전공자에 대한 차별이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인문계열을 포함시킨 46개 기업 가운데 인문계열만을 우대하는 기업은 단 1곳도 없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이 ‘전공 불문’이라고 모집 부문을 표기해 인문계열 구직자에게도 구직 기회를 열어 줬을 뿐이다.

반면 상경계열은 113개 기업 가운데 8곳을 제외한 105개사(92.9%)에서 우대 전공계열에 포함됐다. 이공계열은 82개사(72.6%)에서 우대를 받았다. 이들 기업 가운데 상경계열만을 우대한 기업은 14개사, 이공계열만을 우대한 기업은 5개사였다. 두 계열만을 동시에 우대하는 기업도 20개사나 돼 이들 전공의 취업 환경은 인문계열과 질적으로 달랐다.

올 하반기 4500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삼성그룹의 경우 기술직을 빼곤 모집공고에 특정 계열만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성은 채용인원의 90%에 이르는 4000여 명을 이공계 출신으로 뽑겠다고 8월 밝혔다.

▽모든 길은 상경대로=성균관대 국문학과 4학년인 A(24·여) 씨는 이달 초 학교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 참여했다가 전공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미디어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A 씨는 박람회장에 들어서 관련 기업의 채용상담자를 만났다.

A 씨가 “인문대라서 손해 보는 게 없느냐”고 묻자 채용상담자는 “특별한 불이익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채용상담자의 다음 질문은 “다른 질문이 없으면 다음 사람과 상담해도 되겠어요?”였다. A 씨는 순간 말문이 막혀 쫓겨나듯 그곳을 떠나야 했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선 ‘모든 길은 상경대로 통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고는 취업시장에서 원서조차 내밀 수 없기 때문이다.

연세대에서 이중 전공(복수 전공)을 하고 있는 학생 1842명 가운데 21.7%인 399명이 경영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다. 경제학 316명, 응용통계학 123명까지 합하면 복수 전공자의 절반가량이 상경대 내 학문을 복수 전공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철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는 학생은 18명, 사학은 32명에 불과하다.

▽기업과 대학의 상반된 시각=기업의 인문계열 기피 현상에 대해 기업과 대학은 서로에 책임을 넘기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전문지식이 필요한 기업 특성상 인문학 전공자가 일할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다”며 “A부터 Z까지 다 가르칠 수 없으니 업무 연관성이 높은 전공 출신을 채용해야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SK텔레콤 관계자도 “인문계열 학생들은 아무래도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대학 차원에서 기업의 인턴제도나 공모전 등에 인문계열 학생들을 많이 참여시켜 경영 마인드를 길러 줘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유현실 전문위원은 “홍보, 기획, 일반 영업 등의 분야에선 장기적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쌓은 사람이 더 경쟁력이 있다”며 “기업들이 단기 수익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이런 배타적인 채용 방식이 뿌리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상경계열 80.4% vs 67.9% 인문계열…4개대 취업률 자료분석

인문계 전공자들이 느끼는 취업 불안감은 올 4월 조사된 주요 대학의 전공계열별 취업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본보가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단독 입수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의 전공계열별 취업률을 분석한 결과 4개 대학의 상경계열 취업률 평균은 80.4%로 인문계열(67.9%)보다 12.5%가 높았다.

상경계열과 인문계열 간 취업률 차이는 서울대 27%, 연세대 17%, 고려대 11%, 이화여대 0.7% 순이었다.

정규직 취업률만을 놓고 보면 상경계열(75.3%)과 인문계열(57.5%)의 차이가 17.8%로 더 벌어졌다.

인문계열을 전공한 학생일수록 취업이 어려워 상대적으로 고용 안정성이 낮은 나쁜 조건의 직장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 준다.

서울대의 정규직 취업률을 봤을 때 상경계열은 68.4%인 반면 인문계열은 39.5%로 30% 가까이 차이가 났다.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역시 상경계열의 정규직 취업률이 인문계열보다 7∼24%씩 높았다.

한편 두 계열 사이의 정규직 취업률이 서울대에서 가장 크게 차이 나는 이유에 대해 서울대 관계자는 “인문계열일지라도 서울대 학생들의 취업 눈높이는 높은 반면 기업은 서울대 출신이라고 특별히 더 우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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