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오늘 개교 100주년 담양창평초등학교

  • 입력 2006년 4월 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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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창평영학숙과 창흥의숙으로 출발한 창평초등학교가 1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나재환 교장(오른쪽)이 창흥의숙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담양=박영철 기자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창평영학숙과 창흥의숙으로 출발한 창평초등학교가 1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나재환 교장(오른쪽)이 창흥의숙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담양=박영철 기자
《1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은 전남 담양군의 창평초등학교는 한때 전교생이 1500명을 넘었으나 지금은 쇠락해 가는 여느 농촌학교와 차이가 없다. 지난해부터 신입생이 20여 명에 그쳐 한 학년에 1개 반씩 전교생이 210명. 하지만 학생과 주민 모두 학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월봉산 바라보는 기름진 땅에 금성냇 흐른 물로 마음을 씻어…”라는 교가가 말해 주듯 기름진 땅에서 마음을 씻고 자라난 인재의 산실이다.

설립자 고정주 선생

창평초교는 1908년 4년제 ‘창흥사립보통학교’로 인가 받고 개교했다. 학교의 뿌리는 2년 전 춘강 고정주(春崗 高鼎柱·1863∼1933)가 세운 사립학당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과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던 춘강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규장각의 ‘직각(直閣·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국권을 잃자 “조약을 맺은 대신들은 매국적(賣國賊)이다. 나라 사람들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뒤 낙향한다.

그는 담양에서 창평영학숙과 창흥의숙을 세워 한문 국사 영어 일본어 산술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교사 월급을 비롯한 학교 운영비 일체를 혼자 부담했다.

춘강의 고손자인 광주대 고영진(高英津·한국사상사) 교수는 “춘강의 사상은 전통적 제도와 사상(道)을 지키되 근대 서구적인 기술(器)은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두 학당을 거쳐 간 인물을 보면 한국 현대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민당 수석 총무였던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호남은행 설립자 현준호(玄俊鎬) 등….

보통학교로 개편된 이후에는 고재욱(高在旭·전 동아일보 회장), 고재호(高在鎬·전 대법관), 이한기(李漢基·전 국무총리) 씨가 눈에 띈다.

한 세기 동안 창평초교를 거친 학생은 올해 2월 졸업생까지 모두 8322명. 6·25전쟁 때 납북된 뒤 핵개발을 주도한 이승기(李升基) 전 서울대 공대학장도 졸업생이다.

창평면 주민들은 자치발전협의회를 중심으로 ‘창평초교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회장 유영군·51회 졸업)를 결성했다. 그동안 ‘창평초교 100년사’ 책자 발간, 100주년 기념비와 역사관 건립 등 3대 기념사업을 준비해 왔다.

한양대 박찬승(朴贊勝·한국사) 교수는 “고정주 선생 집안은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 지도층으로서 몸소 애국을 실천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담양=김 권 기자 goqu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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