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日이정희교수 논문…대구에도 차이나타운 있었다

  • 입력 2005년 8월 30일 06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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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일제강점기∼1950년대 화교(華僑·외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중국인이나 그 자손)의 경제 활동이 왕성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 1930년대 대구 시내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포목점과 중국음식점이 즐비해 ‘대구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31일 발간될 대구사학회(회장 최정환·崔貞煥 경북대교수)의 ‘대구사학 80집’에 일본 교토소세이대(京都創成大) 이정희(李正熙·37) 교수가 발표한 ‘20세기 전반기 대구지역 화교의 경제적 활동’이라는 논문에서 드러났다.

▽1905년부터 대구에 화교 이주=중국인의 대구지역 이주는 서울 1882년, 인천 1883년, 부산 1884년 등에 비하면 늦었으나 1904년 2월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철도가 완성된 이후 이 지역에 화교 이주가 크게 늘었다.

1924년 경 대구 경북지역의 화교는 1411명으로 부산 352명, 군산 298명보다 많아 당시 조선 전체 화교의 4%를 차지했다. 울릉도 9명을 비롯해 경북의 거의 모든 지역에 화교가 거주했다.

2002년 현재 대구지역 화교는 1578명(국내 전체의 7%)으로 서울(8900), 인천 및 경기(2300), 부산 및 경남(2300)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1930년대 대구 경제의 큰 축을 담당=이 당시 화교는 물품판매업에 352명, 중국음식점에 66명이 종사했다. 당시 대구지역의 전체 포목상은 815명으로 이 가운데 한국인이 550명(67.5%)인데 비해 화교가 217명(26.6%)으로 화교경제의 핵심역할을 했다. 일본인 포목상은 47명(6.8%)이었다. 현재 대구 중부경찰서∼만경관∼약전골목 거리에 화교가 운영하는 상점이 집중돼 ‘대구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역 가톨릭 건축물 건립에 앞장=1911년 가톨릭 대구대교구가 설립되면서 종교 건축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화교 건축기술자인 강의관(姜義寬)과 그의 제자였던 모문금(慕文錦)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현재 남아있는 대구 계산성당을 비롯해 성유스티노신학대학, 경산 하양성당 등 옛 건축물의 상당수를 이들이 시공했다.

이 교수는 “현재 전 세계의 화교인구는 6000만명이며 동남아시아 경제의 70%가량을 장악할 정도”라며 “일제강점기 때 대구경북지역이 화교의 주요한 거주지였던만큼 이들에 대한 체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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