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피플&피플즈/조선족 유학생 이옥련 씨

  • 입력 2005년 3월 4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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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첫 발을 디딘 중국 화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산둥(山東) 지방 출신이 아니라 임오군란(1882년) 당시 청나라 군인을 쫓아 온 중국 남방 출신 상인들이었다는 사실이 한 조선족 출신 유학생에 의해 밝혀졌다.

최근 인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옥련(42·인하대 사학과) 씨는 학위 논문인 ‘근대 한국 화교사회 연구’에서 당시 청국(淸國)정부의 비호를 받은 광둥(廣東)과 저장(浙江)성 등 남방(南方)출신 40여 명의 군역상인이 청국 군인과 함께 인천에 도착한 것이 화교가 한국에 진출한 시초가 됐다고 밝혔다. 군역상인은 군부(軍部) 또는 군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인.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산둥 지방 출신이 전체 화교의 90% 이상이어서 이들이 한국 화교사회를 구축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재정경제부가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지구에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어요. 인천시도 몇 년 전부터 중구 영종도 100만 평에 세계화교자본을 유치해 차이나 시티를 개발하겠다고 밝혔고요. 하지만 정작 그들의 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화교자본 유치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요.”

중국 지린성(吉林省) 출신인 이 씨는 옌볜대학(延邊大學)에서 일본어를 전공한뒤 1998년 9월 인하대 대학원에 유학와 일어일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천이 화교가 한국에 처음 도착한 지역이라는데 흥미를 갖고 화교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이 씨는 인천시립박물관, 인천시립도서관, 청국 조계(租界)가 있던 중구 항동, 북성동 일대를 수 십 번씩 찾아 자료를 수집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음식점을 하는 상인들과 대화도 나눴다.

그는 각종 문헌과 증언을 통해 1883년 인천개항 당시 인천에는 총 59명의 화상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중 9명은 청국 영사관에서 일했으며 33명은 정식허가를 받은 상인, 나머지 17명은 무허가 상인이었다. 이듬해인 1884년 화상은 모두 205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인천에 자리를 잡은 일본인과 상권을 다투기 위해 청국이 상인을 대규모로 보낸 것.

그는 “당시 청국은 자국 상인을 돕기 위해 인천항에 대형 군함을 띄워 인삼 쌀 등을 밀수하도록 도왔고 일본은 인천항을 통해 수탈을 일삼는 등 한마디로 인천은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그동안의 유학기간중 인천시 공무원교육원에서 중국어 강사 등을 하며 학비를 벌고 ‘인천관광 길라잡이-그래 어디든 가보는 거야’, ‘개항장 근대건축 기행’ 등의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번 박사학위 논문을 인정받아 옌볜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내정된 이씨는 “인천은 제2의 고향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도시”라고 말했다.

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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