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1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당선

  • 입력 2004년 5월 9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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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10일, 마침내 프랑스의 ‘붉은 장미’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현직 대통령인 지스카르 데스탱을 물리치고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다.

드골의 재등장 이후 20년 넘게 우파정권이 이어졌으니, 좌파로서는 이날 “빛과 어둠을 갈랐다”고 감격할밖에.

미테랑은 임기 7년의 대통령 직을 두 번 꼬박 채웠다.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최장수였고, 엘리제궁은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재임 중 두 차례에 걸쳐 좌파 대통령에 우파정부라는 괴이한 쌍두마차를 몰았다. ‘좌우동거’는 사회당 개혁주의에 대한 절묘한 견제와 균형이었고, 당초 우려와는 달리 순항한다.

실용주의자인 미테랑은 수많은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경제에서 그리 멀리 떠나지 않았다. 1991년 유럽통합을 일궈낸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임기 말 잇따라 정치적 스캔들이 터지면서 국민들은 미테랑의 또 다른 얼굴에 당혹했다.

영국의 옵서버는 미테랑이 비시정부(나치의 괴뢰정권) 수반인 필리프 페탱에게서 훈장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비시정부와 그 시대의 께름칙한 기억은 프랑스 현대사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는 얼버무렸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페탱이 프랑스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명의 신인이었고 어렸다.”

뒤이어 전화도청설, 의문사 개입설, 건강기록 조작설이 터져 나온다.

1994년 11월 파리마치는 미테랑이 혼외관계에서 ‘완두콩처럼 꼭 빼닮은’ 20세 된 딸을 두고 있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비난에 휘말린 것은 파리마치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게 르몽드가 뽑은 제목이다.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미테랑은 드골과는 다른 의미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사후에도 ‘미테랑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96년 숨지기 전 미테랑은 탄식했다. “수명을 넘겨 살고 있어….”

그는 주변에 당부했다. “추모연설은 필요 없네. 차빛 장미, 보라와 노란색 붓꽃 다발 외에는 그 어떤 조화도 놓지 말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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