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잘못된 열정'

  • 입력 2003년 11월 11일 18시 26분


코멘트
누군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왜 그처럼 열심히 뛰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다.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일에 악착같이 매달릴 때다.

A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그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부지런히 지역구를 돌며 유권자를 만나고 있다. 지역주민의 민원과 경조사도 빼놓지 않고 챙긴다. 언젠가 그 의원이 지역구에 왔다가 바쁜 일이 생겨 바로 서울로 돌아갔다. 몇몇 군데서 원성이 터졌다. “내려왔으면 당연히 이곳에 들러야지. 키워 놨더니 건방지다.” A의원은 또다시 그런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이제 지역구에만 가면 둘러봐야 할 곳은 모두 둘러보고 있다. 그때마다 ‘봉투’를 챙기는 걸 잊으면 큰일 난다.

국회의원은 입법, 행정부 감시 등 의정활동에 충실하고 그걸로 주민의 평가를 받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중앙에서 아무리 정책 능력을 인정받아도 지역구 관리가 미흡하면 당선을 보장받기 어렵다.

B군은 고등학생이다. 내년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러야 하는 그는 벌써부터 바쁘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가 과목별 과외를 받는다. 어머니는 학원 밖에서 과외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아들을 집으로 ‘수송’한다. 학교 공부만으로는 좋은 성적을 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다.

한국의 정치와 교육은 닮은 점이 많다. 비정상이 정상을 압도하고 돈이 많이 든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선거 때면 시중에 수조원의 돈이 풀린다는 얘기가 나오고 한 해 사교육비가 수조원이 된다는 통계도 있다. 정치인은 엄청난 돈을 쓰면서 선거구를 누비고, 학부모는 사교육에 매달리느라 허리가 휘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학생 모두 안 해도 될 일에 시간과 정력,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열정’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정치인이나 학부모, 학생들을 나무랄 수 없다는 데 비극이 있다. 뭔가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만 불이익을 당하는 데서야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대선자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정치권에는 정치개혁 논의가 한창이다. 예컨대 지구당 폐지는 의원이 비생산적인 지역구 일에 매달리는 것을 막고 검은돈의 흐름도 차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실현될지 의문이다. 각 정당이 지금의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정치개혁을 들고 나오는 측면이 강한 데다 기득권에 안주하고 싶은 현역 정치인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교육 부문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학부모의 믿음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학교 교사보다 학원 교사를 더 믿고 평가하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정치는 현재고 교육은 미래다. 정치와 교육현장에서 ‘비정상’의 그림자를 거둬내지 못하면 현재도 미래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잘못된 열정’이 아니라 ‘올바른 열정’으로 경쟁하고 그걸로 평가받는 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 다른 나라의 정치와 교육은 선진적 제도를 갖추고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기본적인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