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오늘 ‘아웅산 테러’생존자 이기백 前국방장관 인터뷰

  • 입력 2003년 10월 8일 20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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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폭발 테러 당시 생존자 중 가장 심한 중상을 입었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20년간 간직했던 소회를 털어놓고 있다. -박주일기자
아웅산 폭발 테러 당시 생존자 중 가장 심한 중상을 입었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20년간 간직했던 소회를 털어놓고 있다. -박주일기자
“제가 살아남은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혼자 살아 돌아온 게 죄스러워 그 사건과 관련해선 말문을 닫고 살았는데….”

9일은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아시아 5개국을 순방 중이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암살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로 서석준(徐錫俊) 부총리 등 정부요인과 본보 이중현(李重鉉) 사진기자 등 17명의 한국 수행원들이 숨을 거뒀다.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이기백(李基百·72) 전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며 단상 첫줄에 도열해 있던 8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첫줄에 있던 인사들은 이 전 장관을 비롯해 서 부총리,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장관, 김동휘(金東輝) 상공부 장관, 서상철(徐相喆) 동력자원부 장관, 이계철(李啓哲) 주버마대사, 함병춘(咸秉春)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등 8명.

“원래 서 부총리가 가장 오른쪽에 섰어야 하는데 왼쪽으로 가는 바람에 우연히 제가 그 자리에 서게 됐죠. 그런데 마침 지붕 3곳에 설치된 폭탄 중 왼쪽 것만 터져 결과적으로….”

그런 이 전 장관도 30여개의 파편이 온몸에 박혔고 내려앉은 서까래에 깔려 무릎 아래 뼈가 으스러졌다.

“번개가 치듯 섬광이 터지며 잠시 의식을 잃었다 깨보니 불지옥에 갇힌 느낌이었어요. 재가 온몸을 덮어 뜨거움을 참기 어려웠지만 서까래에 깔려 움직일 수 조차 없었어요.”

그때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부관 전인범 중위(현재 대령)가 달려왔다. 전 중위는 다른 수행원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달려와 이 전 장관을 끌어낸 뒤 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버마의 의료 환경이 너무 열악해 조금만 늦었어도 전 죽었을 겁니다. 알코올이 없어 물로 상처를 씻고, 탈지면이 없어 교포들 이불솜으로 대신했으니까요.”

사고 소식을 들은 잭 베시 미군 합참의장이 미국 본토에서 당시 유일한 최첨단 공군의료기를 보내 와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로 후송해 치료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함께 이송됐던 이기욱(李基旭) 재무차관은 결국 숨을 거뒀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2개월여 만에 현역에 복귀, 무장공비사건 등이 발생하면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직접 기자회견에 나섰다. 지금도 사고의 후유증으로 등산조차 못한다는 그는 최근 국민의 안보의식이 약화된 것을 우려하며 당시 테러를 지시한 사람이 여전히 북한을 통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각해보세요. 만일 그때 대통령이 암살됐다면 오늘날 남한의 안정과 번영이 있었을까요. 안보와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국민의 의지와 탄탄한 군사력으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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