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정구복교수가 펴낸 '우리 어머니'

  • 입력 2003년 3월 20일 20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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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복 교수(뒷쪽)와 생전의 어머니. 1997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앞에서 찍었다. -사진제공 정구복교수
정구복 교수(뒷쪽)와 생전의 어머니. 1997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앞에서 찍었다. -사진제공 정구복교수
누구나 한번쯤 자기 어머니의 역사, 어머니의 신세타령 속에 얼핏얼핏 드러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한 역사학자가 그 선례를 보여줬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사에 지속적 관심을 보여온 정구복(鄭求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쓴 ‘우리 어머님’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본래 형제들이 나눠 가지려고 만든 책인데 300부 정도를 찍어 주변에도 돌렸다.

그의 어머니는 1909년 9월13일에 태어나 2000년 12월24일 92세로 돌아가셨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사회적으로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니고 특별한 활동을 한 일도 거의 없는 평범하고 소박한 시골 아낙네였을 따름이다.

‘어머니의 호적 이름은 서옥순(徐玉順)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일생 동안 몇 번 공적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별로 그렇게 친숙하게 불리거나 사용된 이름이 아니다.…어머니는 17세에 시집을 온 후로 시댁에서는 친정마을 충남 공주군 우성면 어천리의 고유 이름인 여우내라는 동네 이름을 따서 ‘여우내댁’으로, 친정에서는 시가인 청양군 청남면 대흥리 갓점에서 딴 ‘갓점댁’이라는 택호로 불렸고 이웃집 사람들에 의해서는 자식들의 이름으로 누구 어머니라고 칭해졌다.’(21∼22쪽)

정 교수가 살펴본 어머니의 호적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당시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이 호적에 올라간 경우도 많았다. 그의 외할아버지 이름은 서병철(徐丙喆)이지만 외할머니 장(張)씨의 이름은 호적 자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큰언니, 그러니까 큰 이모의 이름은 서정식(徐廷植)으로 외할아버지의 제적 등본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호적에는 이 이름이 1918년 3월10일 지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고, 그해 4월4일 출가해 제적된 것으로 돼 있다. 즉 결혼을 시켜 결혼신고를 하려고 보니 호적에 올라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 그 자리에서 호적에 올리고 혼인신고를 한 것이다.

호적에는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상흔이 더덕더덕 붙어있다. 연호만 보더라도 건양 광무 융희의 우리 식 연호, 일제의 명치 대정 소화의 연호, 이를 단기로 일괄 고쳤다가 서기로 고쳐 썼고, 창씨 개명한 사실과 조선 성명으로 복구된 사실도 보인다.

정 교수는 이렇게 어머니의 출생부터 불우한 유년시절, 결혼과 고된 시집살이, 아버지의 일본 입국, 귀국과 광복, 아버지의 죽음, 큰며느리를 얻고 회갑과 칠순, 팔순 잔치를 거쳐 불교에 귀의해 병고와 싸우다 임종하는 과정까지 다루고 있다. 읽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담고 있는 책 한권 분량의 조사(弔辭) 같기도 하고, 어머니로 대표되는 20세기를 다루는 섬세한 생활사 같기도 하다.

그가 어머니의 일생을 통해 현대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20여년 전. 어머니가 틈틈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얘기해주는 것을 듣고 메모를 해뒀다. 어머니의 연세가 많아지면서 기억력을 되새기게 하는 일은 바로 과거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고 생각해 돌아가시기 10년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회상을 메모해 뒀다.

정 교수는 “충남 청양 칠갑산 산자락의 시골뜨기가 대학 교수로 성장한 데에는 내 노력보다 어머님의 힘이 더 중요한 원인이 됐다”며 “어머니의 이야기를 메모해 둔 것을 보고 글로 옮길 적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보완해 올 연말 정식 출간할 계획이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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