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서울역 지하도에 피어난 훈훈한 인정

  • 입력 2001년 1월 15일 11시 23분


15일 새벽 1시, 뼈속을 에는 혹한속에서 어두침침한 서울역 지하도는 잠시 후 다가올 '새벽 한기'와의 일전을 준비하는지 몹시 분주해 보였다.

노숙생활이 2년째라는 성모(60·경남 거창)씨는 작년에 얻은 모자달린 두터운 점퍼를 입고, 이불을 두세겹 깔았다.

그 위에 엎드리듯 모로 누운 성씨의 눈은 껌뻑거리기만 할 뿐 쉽게 잠이 들지는 못할 것 같았다.

IMF(국제통화기금)사태가 빚어낸 비극적 군상인 노숙자들. 그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지 이제 3년이 흘렀다.

이제는 '가족노숙'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악화된 그들의 삶에 또다시 겨울, 그 지독한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15일 오전 기온은 올들어 가장 추운 영하 18.6도를 기록했다.

서울역 지하도에는 통로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20여명의 노숙자가 잠들어 있었다.

가끔 순찰을 도는 경찰 서너명을 빼면 인기척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은 어째 술 먹고 쌈질 하는 놈들도 없구먼"

매일 술에 취해 싸우는 소리에 잠을 못자겠다는 성씨는 추위를 참지못하는지 이리저리 뒤척이다 한마다 툭 던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꺼칠한 피부에 충혈된 눈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보이는 성씨는 바람 피하기가 가장 좋은 지하도 한 복판에서 혼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연장자 우선인지, 경력(?) 우선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배려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여기도 나름대로의 분명한 질서가 있었는데 요즘은 엉망이야"

얼마전부터 서울역 노숙자 세계에도 '불량 노숙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노숙 깡패'.

"서른이 좀 넘은 것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할 생각은 안하고 우리들한테 돈 뺏어가지고는 술 사먹고 해"

성씨의 아들은 S대 물리학과를 나왔다고 한다.

아들 얘기를 하는 성씨는 여느 부모와 다를 것 없이 흥이 나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안모신대요?"

"안모신다는게 아니야. 서울 와 보니까 지들도 살기 힘들어 보여서 내가 집에 간다고 하고 나왔어. 나 여기 사는거 몰라"

성씨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만 말했다. 이유는 말하기 싫다고 했다. 단지 고향에서 혼자 사는게 싫다고만 말했다.

새벽 1시 30분쯤, 지하도 입구쪽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70여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밥과 국을 가지고 노숙자들을 찾아온 교회 학생들이었다.

"자, 식사하세요. 따뜻한 밥하고 국이 있으니까 식사들 하고 주무세요"

서울 길음성결교회와 인천 천광교회 중고등학생 70명과 교사들이 15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 이들을 찾아왔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이다.

"식사를 자주하시지 못하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반그릇 정도밖에 못드시더라구요"

인솔을 맡은 최낙현(28·인천 천광교회 교사)씨는 몸소 잠든 노숙자들을 흔들어 깨우며, 한편으로는 어색해서 구석에 모여서 있는 학생들을 독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여러분들이 직접 식사를 담아서 가져다 드리도록 합시다"

성씨에게 식사 한그릇을 가져온 학생 한명은 무서워서인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학생은 잠시 후 미안했는지 물을 한컵 떠가지고는 옆에다 놓고 갔다.

성씨는 하루 두끼의 식사를 한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에 가서 먹고, 저녁은 서울역 근처에서 나눠주는 국밥을 먹는다. 일요일에는 교회를 찾기도 한다.

"학생들 용돈 쪼개가지고 이렇게 음식 해올텐데 미안해서 어쩌냐. 한창 돈 쓸 나이들일텐데"

어느 틈엔가 노숙자들은 5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한줄로 길게 늘어섰다. 이젠 줄서기가 생활이다.

보통 노숙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더욱 황폐해진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호의적이며 고마워할 줄 알고 그들 내부에 서로를 배려하는 나름대로의 건강함이 있었다.

"무섭기도 하고 TV에서만 보다가 직접 보니까 새롭기도 해요. 이 날씨에 어떻게 길에서 잘 수가 있죠? 지금 서있기도 추운데"

준비해 온 국에 밥을 한주걱 떠 넣고 그 위에 김치를 올려서 숟가락과 함께 노숙자들에게 건네주던 양보희(19·서울 길음 성결교회)양은 연신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학생들은 배식을 마치고 남은 음식을 가지고 회현역을 향해 떠났다.

떠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성씨는 "손주들 같다"면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한모금 연기를 내 뿜을 때쯤 경찰들이 들어왔다.

"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됩니다"

성씨는 얼른 담배의 불똥만 살짝 비벼끄고는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여기가 지하도라서 공기 나빠질가봐 그러는거야"

젊은 경찰들의 공손한 말투에 별반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도 이 추운 날씨에 나가서 피우란 말이야? 으이구"

성씨는 경찰들만 나가면 이내 담배를 물 기세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피우다만 담배를 만지작 거렸다.

"저기 봐, 저 양반은 낮부터 취해가지고 아무것도 안깔고 그냥 엎어저 잔다구. 저러다 얼어 죽지, 죽어"

겨울은 노숙자들에게 너무 힘든 계절이다. 그들에게는 지나친 편견과 과도한 기대보다 '건강'과 '자립의 기회'가 절실할 뿐이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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