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사람이 뇌물의 내용을 일일이 기록한 수첩은 「증거」일까
「자백」일까.
상식적으로는 이 「뇌물장부」를 피의자가 자백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지만 법
원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견해가 엇갈려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문제는 지난 89년 朴대용씨가 낙동강하구 장자도 인근바다에서 골재채취를 허가받
기 위해 부산시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되면서 비롯됐다.
朴씨는 「89년 12월29일 오후1시. 부산시청 부근 자갈치시장. 건설행정계 박○○
20만원」식으로 뇌물을 준 일시와 장소 금액 등을 수첩에 꼬박꼬박 적어놓았다.
형사소송법 310조는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때는 이
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자백외에 다른 보강증거가 없을
때는 유죄선고를 할 수 없기 때문.
법원에 제출된 증거는 朴씨의 자백과 이 수첩 뿐이었고 뇌물이 모두 소액의 현금
으로 전달됐기 때문에 계좌추적 등 다른 증거는 전혀 없었다. 만약 수첩을 자백으로
볼 경우 朴씨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불리한 자백」밖에 없는 셈이 돼 무죄선고
가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실제로 1,2심 재판부는 『이 수첩은 朴씨가 스스로 작성한 것인 만큼 자백에 해당
한다』며 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미있는 것은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은 혐의사
실을 부인했는데도 朴씨의 자백과 이 수첩이 결정적인 증거가 돼 유죄가 선고됐다.
똑같은 증거물이 돈을 받은 쪽에는 유죄의 증거가 된 반면 돈을 준 쪽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는 증거가 된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7일 대법관 12명중 10명의 다수의견으로 이 수첩은 朴씨가
스스로 작성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출내용을 계속적으로 기록한 객관적인 문서인 만
큼 자백이 아닌 별도의 증거로 봐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金正勳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