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완은 쿠민과 섹스턴이라는 두 시인을 그릴 때 특별한 기쁨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 매력적인 검은 머리 여성들이 무척 비슷해 보여서 두 사람을 구별하는 데 기민한 눈이 필요했다. 스완은 잘 손질한 머리와 깃 있는 드레스 너머로 두 사람의 기질을 탐색했다. 쿠민이 정적이라면 섹스턴은 긴장…
수십 년의 세월과 수많은 시행착오 그리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함에도, 그저 불 위에 올려놓고 굽는 것만 같으니 만만하게 생각하는 탓이다. ‘불에 굽는다’라는 일차원적 조리 과정은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은 화려한 겉치레보다 훨씬 이루기 힘든 경지다. 뉴욕 패션공과대…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 자체가 시간 여행이었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원해서 자라는 것도, 원해서 늙어 가는 것도 아닐 테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고 내 바람과 상관없이 학생이 됐으며 내 희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른이 되어…
산책도 내게는 노동에 준하는 일이다. 걷고 발견하고 사색해야 하므로. 이따금 길을 잃기라도 하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므로. 그것이 또 다른 쓰기로 연결될 것이다. 내친김에 일 년 가까이 연락하지 못한 친구에게 전화도 해야겠다. 잘 살아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동안 어떻게…
벚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덩달아 부풀어 오른다. 그건 해가 갈수록 귀해지는 감정이어서 또 봄을 기다리게 되고. 올해도 내 마음이 잘 부풀어 오르나 지켜본다. 오븐 너머로 부풀어 오르는 빵을 지켜보듯이. 잘 구워지고 있나, 내 마음. 봄볕에 여전히 부풀어 오르고 있나. 그게 마치…
당연한 건 없다. 아들이 어서 기운 차리기를 바라며 마늘향 우려 고기를 볶는 마음, 잎 두 장 딸린 스킨답서스를 키우는 마음, 버려진 싱고니움을 데려다 삼십여 장의 잎이 달린 식물로 키워내는 마음, 산책로를 돌보는 마음.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쓴 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
정원에 식물을 심을 때 내 마음은 한결같다. 이 식물이 여기에서 잘 지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종종 내가 심은 자리에서 식물이 힘들어하는 일도 생긴다. 이럴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다. 그 자리에서 잘 자라도록 더욱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도 있지만, 아예 뿌리를 들어…
모든 순간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손에 쥔 참치 캔의 단단한 감촉이,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탐스러운 눈송이가, 자작나무 가지마다 핀 눈꽃이, 눈꽃을 물들이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맞은편 여자 기숙사 쪽에서 타박타박 다가오는 아담한 그림자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흩어지는 입…
그는 자유롭게 이 거리를 걷고 싶을 뿐이다. 그 누구의 손에도 붙잡히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기대를 심어주지 않고서. 그저 자유롭게 걷고 내달리고 잠들고 싶을 뿐이다. 저 공마은처럼. 바로 당신처럼.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가 여성 자영업자의 고단함과 연대를 그려낸 장편소설.
아마도 그의 트럼펫 연주는 인간의 목소리에 매우 가깝지 않나 싶어요. 그게 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쳇 베이커는 정말 로맨틱한 사람이었죠. 동시에 아주 많은 고통도 지니고 있었을 겁니다. 난 그가 사랑과 이해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믿어요.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엄마의 죽음은 거대하게 벌어진 구멍을 남겼다. 하지만 나는 그 빈자리에 대해 분노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 구멍을 절실히 메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내 자신이 엄마가 될 날을 눈앞에 두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하지만 나를 먹여줄 엄마는 거기에 없었다. 미국 …
나는 제자리에 서서 눈앞에 자리한, 한 치의 틈도 없이 조밀하고 짙은 어둠 속을 바라본다. 나는 어둠이 변하는 것을 본다, 아니, 어둠이 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둠 속의 무언가가 어둠과 분리되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자세히 보인다.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
나와 같은 편의점 인간들이 공감하는 직업병 같은 것인데 그건 바로 ‘전진 입체 진열’이다. 상품이 판매되고 난 후 진열대에 빈 공간이 없도록 뒤에 있는 상품들을 앞으로 당겨 진열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야 상품이 눈에 잘 띄고 볼륨감 있게 연출돼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배…
사람들에게 재능이 하나씩은 있다고 한다. 하늘이 준 선물, 다른 말로 하면 시간 대비 효율이 가장 좋은 일. 나에게는 운동이 그랬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재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재능도 노력 없이는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돼서다. 이제는 우연히 나에게 주어진 선물에 …
나는 인터뷰집이 좋다. 나와는 다른 사람, 먼저 어려운 길을 간 사람과의 대화에선 분명 배울 점이 있다. 노포에 들렀을 때 사장님이 늘어놓는 살아온 이야기나 집회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폭로하듯 뱉어내는 이야기나 부모님이 조곤조곤 털어놓는 과거 이야기를 즐긴다. 사람은 다 저마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