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선 허투루 사람을 사귀기도 하지만, 이 어르신은 전혀 딴판이지.흥 나서 글씨 쓰면 성인의 경지요, 취한 후 뱉는 말은 거칠 게 없지.백발이 되도록 늘 한가롭게 지내기에 그저 푸른 구름만이 눈앞에 있었지.침상 머리맡엔 언제나 술병이 하나, 얼마나 더 이분을 취해 잠들게 할는지.(世…
채찍 떨군 채 말에게 길 맡겼는데, 몇 리를 가도록 닭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비몽사몽 숲길을 지나다가 날아온 낙엽에 화들짝 놀라 깨니서리 엉기는 때 저 멀리 홀로 나는 학, 희뿌옇게 새벽달이 걸린 먼 산.아이야, 길 험하다 불평하지 마라. 시절도 태평하고 길 또한 평탄하거늘.(垂鞭…
장안 거리 붉은 먼지 얼굴을 스치는데, 모두들 꽃구경 다녀온다고 떠들어대네.현도관의 많고 많은 복숭아나무, 이 모두가 내 귀양 간 다음에 심은 것들이지.(紫陌紅塵拂面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꽃구경하고 돌아오는 군자들에게 장난삼아 보내다(희증간화제군자·戱…
무쇠 같은 얼굴, 푸른 수염, 번뜩이는 눈매. 세상 아이들이 이걸 본다면 질겁할 테지.이 몸 나라에 바쳐 오랑캐 평정하리라 맘먹었거늘, 때를 못 만났으니 물러나 농사나 지어야 하리.문장 좋아한다고 할 정도는 못 되어도 붓과 먹을 가까이했고, 스스로 병 많음을 탄식해도 마음만은 더없이 …
사람들 모두가 강남이 좋다 하니, 나그네는 당연히 강남에서 늙어야 하리.봄 강물은 하늘보다 푸른데, 꽃배 안에서 빗소리 들으며 잠이 든다.술청 곁엔 달처럼 어여쁜 여인, 눈서리가 엉긴 듯 희디흰 팔. 늙기 전엔 고향에 가지 말지니, 고향 가면 분명 애간장이 다 녹을 터.(人人盡說江南好…
막걸리 갓 익을 즈음 산으로 돌아오니, 가을이라 기장 먹은 닭 오동통 살이 올랐네.시동(侍童) 불러 닭 삶고 술 마시는데, 아이들은 희희낙락 내 옷자락에 매달린다.스스로 위안 얻으려 목청껏 노래하고 술에 취해, 더덩실 춤을 추며 낙조와 빛을 겨룬다.천자께 내 뜻을 펼치는 게 분명 늦긴…
관직 여러 번 옮기는 것보다 과거 급제가 훨씬 낫지. 황금빛 도금한 안장에 올라 장안을 나섰네. 말머리가 이제 곧 양주(揚州) 성곽으로 진입하겠거니, 두 눈 씻고 날 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게.(及第全勝十改官, 金鞍鍍了出長安, 馬頭漸入揚州郭, 爲報時人洗眼看.) ―‘급제 후 광릉 친구…
저녁나절 부슬부슬 비 내리는 강마을. 밤 되자 찾아온 도적들이 날 알아보네.앞으로는 이름 숨기고 살 필요 없겠군. 지금 세상 절반이 그대들과 같겠거늘.(暮雨瀟瀟江上村, 綠林豪客夜知聞. 他時不用逃名姓, 世上如今半是君.)―‘정란사에서 묵다 밤손님을 만나다(정란사숙우야객·井欄砂宿遇夜客)’ …
그대의 시집 들고 등불 앞에서 읽었소. 시 다 읽자 가물대는 등불, 아직은 어두운 새벽.눈이 아파 등불 끄고 어둠 속에 앉았는데, 역풍에 인 파도가 뱃전 때리는 소리.(把君詩卷燈前讀, 詩盡燈殘天未明. 眼痛滅燈猶闇坐, 逆風吹浪打船聲.) ―‘배 안에서 원진(元유)의 시를 읽다(주중독원구시…
조정에서 나오면 날마다 봄옷 저당 잡히고, 매일 강가로 나가 잔뜩 취해 돌아온다.가는 곳마다 으레 술빚이 깔리는 건, 인생 일흔 살기가 예부터 드물어서지.꽃밭 속 오가는 호랑나비 다문다문 보이고, 물 위 스치며 잠자리들 느릿느릿 난다.봄날의 풍광이여, 나와 함께 흐르자꾸나. 잠시나마 …
중년부터 퍽이나 좋아했던 불도, 만년 들어 마련한 남산 기슭의 집.흥이 나면 늘 혼자 그곳에 갔고 즐거운 일은 그저 혼자만 알았지. 물줄기가 끊어진 곳까지 걸어가서는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았고 우연히 숲속 노인을 만나면 담소 나누느라 돌아올 줄 몰랐지.(中歲頗好道, 晩家南山수…
매실은 신맛이 돌아 치아를 무르게 하고, 파초는 창문 비단 휘장에 초록빛을 나눠준다. 긴긴해 낮잠에서 깨어나 무료해진 마음, 버들솜 잡는 아이들을 한가로이 바라본다. (梅子留酸軟齒牙, 芭蕉分綠與窓紗. 日長睡起無情思, 閑看兒童捉柳花.)―낮잠에서 깨어난 한가로운 초여름(한거초하오수기·閑…
다시 오마 빈말 남기고 떠난 뒤엔 뚝 끊은 발길. 달은 누각 위로 기울고 새벽 알리는 종소리만 들려오네요. 꿈속, 먼 이별에 울면서도 그댈 부르지 못했고, 다급하게 쓴 편지라 먹물이 진하지도 않네요.촛불은 희미하게 비췻빛 휘장에 어른대고, 사향 향기 은은하게 연꽃 수 이불에 스미네요…
활 모양의 초승달 아직 반달은 아니지만, 또렷하게 푸른 하늘가에 걸려 있구나.사람들이여, 눈썹 같은 초승달 작다 마시라. 보름날 둥글어지면 온 천지 비출지니. (初月如弓未上弦, 分明掛在碧소邊. 時人莫道蛾眉小, 三五團圓照滿天.)― ‘초승달을 노래하다(부신월·賦新月)’ 무씨의 아들(무씨자…
근심이라곤 모르던 안방 젊은 새댁, 봄날 단장하고 화려한 누각에 오른다. 문득 시야에 잡힌 길섶의 푸른 버들, 낭군더러 벼슬 찾으라 내보낸 걸 후회한다.(閨中少婦不知愁, 春日凝粧上翠樓. 忽見陌頭楊柳色, 悔敎夫壻覓封侯.) ―‘안방 여인의 원망’(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