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식량차관 합의서 ‘부실’… 北 안갚아도 책임 못묻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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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아닌 ‘남측-북측’ 주체… 北당국 지급보증도 명시 안해
통일부 “연체 통지문 北발송”

한국이 제공한 대북 식량차관의 상환기일이 지났는데도 북한 당국이 그 책임을 미루면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 남북 합의서가 허술하게 작성돼 법적 책임을 따지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8일 “2000년 제공한 대북 식량차관의 첫 상환기일이 7일이었으나 북한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며 “오늘 다시 차관계약 불이행 사실을 지적하고 환수를 촉구하는 통지문을 북한에 발송했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통지문을 수신하고도 30일이 지나도록 상환하지 않으면 채무불이행 사유가 된다는 점을 거듭 고지했다”고 덧붙였다.

남측은 2000년 8836만 달러 상당(쌀 30만 t, 옥수수 20만 t)의 식량차관을 제공했으며, 북한이 이번에 갚아야 할 돈은 첫 상환분 583만 달러다. 앞으로도 북한은 2000∼2007년 제공된 식량차관 7억2005만 달러를 비롯해 철도·도로 건설, 경공업 원자재 차관 등 총 9억3054만 달러에 대한 원리금을 갚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2000년 9월 체결한 남북 식량차관 제공 합의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합의서의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남측’ ‘북측’으로 돼 있어 국제법상 당국 간 합의문이라 보기 어렵고 분쟁 발생 때 이행조치가 명시돼 있지 않아 북한 당국의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이 합의서에 북한 당국의 지급보증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실책으로 꼽힌다. 모두 7항으로 작성된 합의서는 분쟁조정 절차를 명기하지 않고 ‘합의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남북 당국이 협의해 해결한다’고만 돼 있다. 비슷한 시기인 2000년 2월 한국과 중국이 맺은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에 대한 약정서’에서 중국 정부가 차관의 적기 상환과 이자 지급에 대해 재정부 명의로 지급을 보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남북은 당시 차관 공여와 상환의 구체적인 방법을 한국수출입은행과 조선무역은행 사이에 별도로 체결하는 차관계약에 따르도록 했다.

이날 대북 통지문이 정부 명의가 아닌 수출입은행장 명의로 발송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출입은행은 계약 상대방과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차관계약의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2%의 연체이자를 부담한다’는 구절을 제외하면 계약 불이행을 강제할 수단은 차관계약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식량차관#남북 합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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