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재계인사들은 ‘백 댄서’?

  • 입력 2004년 9월 14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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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통령은 힘이 무척 세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힘이 별로 없다고 하소연하는 작전을 애용하지만 임기가 오래 남은 집권자에게 왜 힘이 없겠는가.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하루아침에 ‘예스맨’ 집단으로 돌변한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대통령의 러시아 및 카자흐스탄 방문 건에서도 그 위용이 드러난다. 수행(隨行)하는 재계 인사가 50여명이나 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 등 ‘오너 빅3’를 포함해 강신호 전경련 회장 등 경제 5단체장이 함께 간다.

▼대통령 해외순방 대거수행▼

이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에둘러 말할 것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나서는 것 아닌가. 그들은 이런 이벤트성 외교행사에 동참해 봐야 실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대통령 행차’를 빛내 주는 ‘백 댄서’ 역할을 하는 것임을 왜 모르랴.

물론 청와대에서야 강제 동원이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당하는 당사자로서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공중분해된 그룹도 있다는 걸 기업인들은 기억한다. 대기업그룹 가운데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수행 기업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해외투자 설명회에 가야 한단다. 이런 ‘불복종’ 때문에 미운 털이 박힐까봐 최 회장은 노심초사하지 않을까.

정부는 걸핏하면 대그룹 총수가 ‘황제 경영’을 한다고 꼬집는다. 이 표현대로라면 황제 여럿을 거느리고 위세를 과시하며 외국을 방문하는 ‘황제 위의 대통령’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과거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한 대통령이 재계 대표들을 외국 방문에 수행시키는 것을 보니 옛 행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대통령은 “기업들의 행사 때 격려하기 위해서 자주 참석했다”고 발언한 것처럼 기업인들의 대(對)러시아 사업을 돕기 위해서 좋은 기회를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이런 배려를 못 베풀랴.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높은 사람을 따라가는’ 수행을 바라지 않는다. 민간 기업인들을 무더기로 차출하는 것은 민폐(民弊)다.

마침 13일 노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때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기업 자체의 필요와 무관하게 기업인들을 동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수행기업인단’이라는 명칭도 바꾸는 게 좋다고 했단다. 적절한 지시다. ‘50명 수행’ 계획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일부 기업인들은 비행기 티켓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각자 떠나기로 했기에 항공편이 적은 카자흐스탄행 표를 구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혹 티켓을 못 구해 못 떠난다 해도 ‘괘씸죄’를 씌우지 않기를….

노 대통령은 내달에 인도, 베트남을 방문하고 이어 올해 안에 남미 및 유럽 몇 나라를 순방할 계획이라 한다. 그때마다 재계 인사들을 백 댄서로 차출할 것으로 우려했는데 대통령의 지시가 실행된다면 기우로 그칠 것이어서 다행이다.

▼‘괘씸죄’가 두려워서…▼

집권층은 권위주의 정권의 관존민비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도 그런 면모를 보인다. 청와대의 홍보기획비서관이 민간기업에 전화를 걸어 대통령 참석 행사의 비용을 분담하도록 요구한 것도 한 사례다.

“기업가정신이 실종됐다”고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개탄했다. 그러나 그 책임의 대부분은 권력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관치(官治)가 횡행하며 민간인들을 주눅 들게 하는데 어찌 기업가 정신이 꽃필 수 있으랴.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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