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막힌 가정에서 자살은 시작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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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예방 치료공연 ‘백색의 터널’

치료적 공연 ‘백색의 터널’은 연기하는 배우와 이를 지켜보는 관객 모두에게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관객들이 새 아빠 역을 맡은 배우의 대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연극치료협회 제공
치료적 공연 ‘백색의 터널’은 연기하는 배우와 이를 지켜보는 관객 모두에게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관객들이 새 아빠 역을 맡은 배우의 대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연극치료협회 제공
“상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치료입니다.”

16일 서울 대학로 극장 정미소에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연극치료협회가 주관하는 자살예방 연극치료 공연 ‘백색의 터널’이 열렸다. 12∼21일 상연되는 이 공연은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자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치료적 공연. 백색테러처럼 느닷없이 맞이한 불운의 터널을 함께 헤쳐 나가자는 취지로 마련한 것이다.

공연은 파괴된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큰딸 지영이, 친한 친구를 자살로 잃은 작은딸 지혜, 왕따로 괴로워하는 아들 찬형, 매일 술만 마시는 새 아빠와 그를 구박하는 엄마. 가족들은 서로의 상처를 알지 못한 채 또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준다. 연출가 김숙현 씨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부터 귀를 닫고 근본적인 문제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면 평생의 상처로 남게 된다”며 “이는 사회생활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연장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는 극단적으로 가면 자살을 부른다”고 말했다.

진짜 포인트는 연극이 끝난 뒤 시작됐다. 연극치료사 5명이 무대 위에 올라온 것. 치료사들은 극중 배우 5명의 대사와 연기를 한 소절씩 골라 재연했다. 그리고 김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대부분의 관객이 자신이 가장 공감했던 배우를 연기한 치료사 앞에 모였다.

“엄마는 왜 그렇게 딸에게 집착했던 거죠?” “지영이는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심한 말을 내뱉을 수 있나요?”

치료사가 “이 배우에게 공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관객들이 하나둘 입을 떼기 시작했다. “배우의 감정을 직접 표현해 보라”는 치료사의 말에 한 관객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며 크게 소리쳤다. 배우의 이야기를 하던 관객들은 가족과 친구, 자신의 이야기로 주제를 옮겨가며 곳곳에서 흐느꼈다. 아파하는 이들에게 누군가는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조용히 휴지를 건네줬다.

관객들은 “배우들 속에서 나와 내 주변인들을 발견했다”고 입을 모았다. 중학생 유진화 양(13)은 “답답할 때마다 소리치고 화내는 지혜의 모습은 곧 내 모습이었다”며 “함께 이야기 나눈 관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위로해줬듯, 나도 힘들 때 스스로를 잘 다독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재호 씨(26)는 “극 중 힘든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삼겹살 사먹으라며 돈을 쥐여주던 엄마의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며 “우리 어머니도 자식에게 때로는 본인의 감정을 숨기며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관객은 물론 배우들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었다. 배우들의 진짜 이야기는 연극 속 대사 하나하나에 각색돼 녹아들어 있었다. 김 연출가는 “배우들이 진한 상처와 아픔을 토해내며 백색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이 정말 고됐다”며 “대중 앞에서 아픔을 표현해내는 제작 과정은 곧 배우 자신들의 치료과정이었다”고 전했다.

연극을 마련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우울증과 자살 충동은 자신에게만 불행이 반복된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며 “이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자신의 문제를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고 서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지연 기자 lima@donga.com
#자살예방#백색의 터널#연극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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