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우리들, 떨리는 첫 무대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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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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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80대 노인들의 연기 향연 ‘청춘 연극제’ 가보니

“멍멍!” “아이고, 아버지 왜 해피 집에 들어가 계세요! 치매가 드셨나? 여보 어서 병원으로 옮기자고.” 제2회 청춘연극제 출품작인
연극반 ‘연빛’의 ‘강아지집 속 할아버지’. 세대 간 소통 부족과 노인경시 풍조를 꼬집은 이 창작극은 탄탄한 대본과 전문 배우 못지
않은 연기가 돋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공
“멍멍!” “아이고, 아버지 왜 해피 집에 들어가 계세요! 치매가 드셨나? 여보 어서 병원으로 옮기자고.” 제2회 청춘연극제 출품작인 연극반 ‘연빛’의 ‘강아지집 속 할아버지’. 세대 간 소통 부족과 노인경시 풍조를 꼬집은 이 창작극은 탄탄한 대본과 전문 배우 못지 않은 연기가 돋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공
막이 오르기 10분 전, 무대 뒤는 조용하지만 분주하고 어둡지만 살아 있다. “선생님, 대사 기억 못 하면 어쩌지요.” 두꺼운 분장으로도, 60년 넘게 살아온 경륜으로도 떨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강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을 주었다. “어머니, 욕심내지 말고 평소 어머님답게만 하시면 돼요.”

올 여름과 가을 내내 외우고 익힌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15분은 짧았다. 하지만 도중에 대사를 잊어 발을 동동 구른 이도, 프로 못지않은 발성과 연기를 뽐낸 이도 모두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15일 서울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열린 ‘청춘 연극제’는 전국 노인복지관 연극반에서 활동하는 60∼80대 ‘연기자’들이 무대를 빌려 마음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속 시원히 토해 내는 자리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한 연극제는 올해로 2회째다. 23개 팀 가운데 온라인 예심과 권역별 예심을 거친 6개 팀이 무대에 올라 창작극 4편과 퓨전마당극, 악극을 선보였다. 노인의 이성 문제, 버려지는 노년의 삶과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부산노인종합복지관 연극반 ‘연빛’의 창작풍자극 ‘강아지집 속 할아버지’는 가정에서 홀대받는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강아지 ‘해피’를 부러워하던 주인공. 그를 본체만체하던 가족들은 주인공이 강아지 집 속으로 들어가 멍멍 짓자 그제야 병원에 모시고 간다. “멍멍” 짖으며 실감나게 해피 역을 연기하는 할머니를 보고 즐거워하던 관객들은 할아버지가 “해피 너는 배고프면 알아서 밥 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지만 나는 아무도 돌보질 않는다”며 처연하게 읊조리자 “며느리가 못된 ×이구먼” 하며 흥분하기도 했다.

서울 신내노인종합복지관 ‘붐붐시니어연극단’의 ‘봄이 가면 내가 봄이 되어’는 노년에 찾아온 사랑을 아련하게 그렸다. 연극반 수업 때 설문조사를 했는데 노인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이성 문제였다. 험한 시집살이와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견뎌 온 꽃분이가 연극반에서 첫사랑을 만나지만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이별한다는 줄거리였다.

울산노인복지관 연극반의 ‘동치미’는 사업 실패로 손 벌리는 아들, 배우를 꿈꾸며 대학로를 배회하는 막내딸 등 필요할 때만 부모를 찾는 자식들을 둔 부부가 주인공이다. 자식복은 없어도 금실은 좋았던 부부. 어느 날 부인이 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자 남편은 영정 사진을 염두에 둔 듯 “우리 사진이나 찍자”고 말하고 막이 내린다. 관객들은 오래도록 눈가를 훔쳤다.

서울 도봉노인종합복지관의 연극반 ‘울력’은 씩씩했다. 이들은 ‘99세까지 팔팔하게’라는 뜻을 담은 창작극 ‘9988 쾌지나 칭칭’을 통해 저승사자들에 당당히 맞서는 노인들을 보여줬다.

연극반 4년차에 접어든 임명희 씨(66·여)는 “관중이 내 연기를 보고 우는 모습을 보니 구름 위에 앉은 듯 황홀한 기분”이라고 전했다. 김경순 씨(65·여)는 “연극이 끝나고 박수받을 때만큼 값진 순간도 없다”고 했고, 백규탁 씨(65)는 “아직도 무대 뒤에서는 늘 긴장이 되지만 뮤지컬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붐붐시니어연극단’을 지도하는 강사 강혜라 씨(43·여)는 “연기는 경험에서 우러나온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만 제시하면 풍부한 감정 표현이 가능해요. 연륜, 그거 무시 못 하겠더라고요.”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청춘연극제#연극#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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