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아이들, 세뱃돈 기쁨만큼은 알고 자라야지”

  • 입력 2009년 1월 2일 19시 55분


1980년부터 30년 동안 새해가 되면 서울 관악구 남현동 상록보육원을 찾아 원생들에게 세뱃돈을 전달해 온 하유생(76) 할머니. 2일 상록보육원을 찾은 하 할머니의 볼에 한 원생이 입을 맞추고 있다. 김재명기자
1980년부터 30년 동안 새해가 되면 서울 관악구 남현동 상록보육원을 찾아 원생들에게 세뱃돈을 전달해 온 하유생(76) 할머니. 2일 상록보육원을 찾은 하 할머니의 볼에 한 원생이 입을 맞추고 있다. 김재명기자
1일 서울 관악구 상록보육원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다섯 살 때 보육원에 맡겨져 대학 입학 전까지 지내다 지난해 말 한 시중은행에 취업한 김모(26·여) 씨가 동생들을 찾아 온 것. 이날 김 씨는 보육원 동생들과 중요한 약속을 했다. 첫 월급을 받는 이번 달부터 김호진(5) 군에게 매달 2~3만원 씩 용돈을 주고 함께 휴가를 가는 등 '맞춤 기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김 씨가 이 같은 결심을 한 것은 '세뱃돈 할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올해 76세인 하유생 할머니는 1980년부터 한해도 빠짐없이 1월 2일이 되면 보육원 아이들을 찾아 세뱃돈을 주고 있다.

김 씨는 "할머니가 빳빳한 지폐를 쥐어주며 '먹고 싶은 거 꼭 사먹고 기죽지 말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나도 첫 월급을 타면 동생들을 위해 꼭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일 할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종이가방을 들고 보육원을 찾았다. 가방 안에는 원생들 이름이 일일이 적힌 81개의 세뱃돈 봉투가 들어있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나이별로 줄지어 선 원생들이 새배를 할 때마다 할머니는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5000원~1만 원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두 살 때 들어와 올해 대학 졸업반이 된 박모(22) 군이 절을 하자 할머니는 "기저귀 갈아 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총각이 다 됐네"라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엔 산타복장을 하고 찾아오는 분들이 더러 있지만 설날엔 사람들이 다들 자기 가족 찾아가느라 고아들에겐 가장 힘든 날"이라며 "요즘 하도 불경기인데다 나도 20년 전 은퇴한 남편 퇴직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라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올려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일제시대에 정미소를 운영했던 할머니 가족들은 가장이 독립운동을 나가 굶주려야 했던 이웃 주민들에게 매달 쌀과 보리를 대줬다. 할머니는 "도움을 받은 후손들이 매년 설마다 감사 인사를 오는 광경을 자주 접하면서 봉사를 결심했다"고 했다.

한창 자녀를 키우느라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1960년~70년대에는 주변 고아원을 찾아 터진 양말이나 속옷을 꿰매줬다.

할머니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세뱃돈 할머니'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부모의 빈자리는 명절 때 크게 느껴지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세뱃돈으로 산 장난감을 자랑할 때 보육원 아이들은 얼마나 상처를 받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6년 전 칠순잔치 때 보육원 아이들에게 받은 감사편지를 아직도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 편지에는 "할머니가 주신 세뱃돈으로 읽고 싶었던 책을 샀어요. 이 책을 읽고 교수님이 될 거에요. 제가 성공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보는 날까지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씌어있었다.

신광영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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