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新계급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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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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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학교폭력이 원래 심했는데 어른들만 몰랐던 것인가. 경찰이 학교폭력 소탕을 너무 열심히 하는 건가. 입 안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음란행동을 강요하고, 손자를 못 끌고 나가게 막는 할머니를 폭행하는 ‘막장 10대’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조직폭력배 뺨치는 폭력수위를 보면 크메르루주에 세뇌돼 가족을 학살한 것도, 문화혁명 시대 홍위병도 천진한 얼굴을 한 청소년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게임 속 세상

요즘 아이들의 대화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짱’이다. ‘장(張)’에서 유래된 일본어 ‘짱(ちゃん)’은 ‘최고’라는 의미다. 하필이면 ‘짱’일까. 권위적 냄새를 풍기는 이 말에서 청소년 의식에 내면화한 계급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용어만 그런 게 아니다. ‘제2의 교복’이라는 노스페이스 점퍼에도 ‘계급’이 있다. ‘찌질이’들이 입는 점퍼가 있고, ‘짱’이 입는 점퍼가 있다. 같은 브랜드 점퍼를 입는 몰개성을 탓하기 전에 그렇게 해서라도 또래집단에서 동질감과 소속감을 확인하려는 아이들의 심리를 읽을 필요가 있다.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에서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친구 사이였던 아이들이 어떻게 상명하복의 주종(主從) 관계에 이르게 됐는가 하는 점이다. 15일 게임문화재단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한 교수는 게임을 통해 “대인관계를 맺는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집중력과 인지기능을 높일 수 있다”며 게임의 긍정적 효과를 역설했다. 롤플레잉(role-playing·역할 놀이) 게임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다. 미국 일본 청소년도 게임을 하지만 ‘닌텐도’ 같은 콘솔게임을 즐긴다. 우리처럼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즉 롤플레잉 게임을 많이 하는 나라도 드물다. 롤플레잉 게임은 여러 명이 온라인으로 접속해 각기 다른 캐릭터 역할을 수행하며 몬스터(괴물)를 사냥한다.

롤플레잉 게임의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현란한 디스플레이는 한국이 정말 게임 강국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게임 스토리가 현실사회와 닮아 소름 끼칠 정도다. 현실사회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돈과 권력으로 움직인다. 게임 속 세상이 그렇다. 각기 다른 직업과 특징을 지닌 종족이 등장하고, 사냥터 마을 아이템을 사고팔 수 있는 상점이 존재한다. 게임 규칙은 간단하다. 레벨(권력)을 높여야 한다. 레벨을 높이는 방법은 미션을 해결하거나 몬스터를 사냥해 점수를 올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게임 아이템(돈)이 있으면 레벨을 쉽게 높일 수 있으니 돈이 있으면 권력도 얻기 쉬운 현실세계와 닮지 않았나. 현실세계에서 신분 상승의 통로가 열려있듯 게임 속 캐릭터도 그렇다. 상대를 죽이고, 찌르고, 망치로 내리치는 폭력성은 성공을 향한 현실세계의 몸부림과 경쟁구조를 극대화한 것이다.

게임 캐릭터에서 세상 배우는 아이들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해야 점수를 따는 게임 스토리에서 건강한 대인관계를 배울 수는 없다. 폭력을 내면화하고 계급구조를 그대로 구현하는 대인관계라면 몰라도 말이다. 시위대도 폭력을 쓰고, 국회의원도 폭력을 쓰는 나라에서 학교폭력의 원인을 왜 게임에만 돌리느냐는 게 업계의 항변이지만 폭력에 연루된 아이들이 게임을 많이 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성적으로 서열을 매기는 교육시스템에서 성적이 아닌, 게임 분야에서라도 또래에게 인정(認定)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셧다운제에 이어 정부가 쿨링오프제(게임 시작 후 2시간이 경과하면 게임이 종료되는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게임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게임 속 계급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로 아이들을 끌어내야 한다. 게임시간 규제만으로는 부족하고 폭력성을 전염시키는 콘텐츠를 추방하고 좋은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이 급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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