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오세정]의학교육 제도개편 시급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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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필자가 가르치는 공과대학 신입생을 위한 물리학 강의에 농업생명과학대학 4학년 여학생 두 명이 수강신청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보통 여학생들은 물리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서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이 두 명이나 물리학을 듣겠다고 찾아온 것이 기특해 수강신청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물리가 좋아서란다. 흔쾌히 수강을 허락했다. 그 후 이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수업에 열심히 임하였고 결국 학기말에 좋은 학점을 취득했다.

그러나 기특하고 흐뭇했던 마음도 잠시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학생들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에 필요한 의학교육입문검사(MEET) 시험 준비를 위해 물리학을 수강한 것이었다. 학원보다 싼 값에 교수 강의를 듣는 기회로 이용한 것이다.

이처럼 요즘 대학가에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치의학전문대학원(치전원) 바람이 거세다. 자연과학대 생명과학부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과대학이나 농업생명과학대에서도 생물학과 화학을 공부하는 학과의 많은 학생이 졸업 후 이른바 ‘의사고시’를 보기 위해 학원을 전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공계의 우수한 생물학 화학 전공자의 씨가 말라 국가의 균형 잡힌 과학발전이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로 서울대, KAIST, 포스텍 등 소위 ‘일류대’의 생명과학과 졸업생들은 2002년만 하더라도 57%가 생명과학 관련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는데 2010년에는 그 비율이 16%로 급감했다. 게다가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악화되면 악화됐지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우수 이공계 인력으로 국가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까지 의전원 진학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이공계, 의사 약사 예비과정인가

그러면 이처럼 우수한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의전원, 치전원 교수들은 만족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원래 의·치전원을 만들 때의 명분은 학부에서 다양한 전공을 이수한 학생들을 받아 의료 및 바이오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에 기여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기대와는 달리 의·치전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 후 연구 대신 병원을 개업해 돈 버는 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결국 똑같은 의사를 길러내는데 기간만 2년 연장되고 돈만 더 들어가는 셈이 된 것이다. 또한 의·치전원 제도를 도입할 당시 정부는 의예과 치의예과 진학 경쟁의 치열함을 완화한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하지만 지금 많은 이공계 학생들은 대학 졸업 후 의·치전원 입학을 위해 학원가에서 재수 삼수를 한다. 지금 와서 보면 단지 의사가 되기 위한 입시전쟁의 시기를 4년 뒤로 미루었을 뿐 본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전혀 없다.

이처럼 당초 목적과는 달리 부작용만 양산하는 정책은 하루빨리 폐기하거나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옳다. 다행히 정부는 의·치전원 제도에 대한 종합검토를 하기로 지난해 약속했고,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이달까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제도개선위원회가 활동하면서 공청회를 개최하고 각계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대학의 자율적인 선택을 주장하는 데 비해 교육부가 의·치전원 제도를 무리하게 추진했던 과거에 얽매여 방향을 전환하는 데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정책을 결정하는 공무원도 사람이기 때문에 정책의 결과를 잘못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을 시행한 결과 기대했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부작용이 크다고 판명되면 하루빨리 바로잡는 것이 국민을 위한 공복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의·치전원 도입의 두 가지 명분은 다양한 배경의 의학자 양성과 대입 경쟁의 완화였다. 그런데 이런 명분은 실현되지 않고 오히려 이공계 인력 공급에 커다란 차질을 빚는 부작용만 키우고 있으니 개선이 시급한 것이다.

국가의 미래 경쟁력 암울하다

사실 이공계 관점에서는 더욱 우려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약대가 2+4의 6년제로 전환하면서 내년부터 학부 2년을 수료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학생을 모집하는 일이다. 현재 약대의 인기로 보아 많은 이공계 학생들이 여기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약대의 경우는 학부 2년 수료생을 대상으로 뽑기 때문에 학부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는 의·치전원 제도보다 이공계 학과의 학사 진행을 더욱 파행적으로 만들 위험성이 크다.

일부 이공계 교수들은 이제 자기네 학과가 의사 치과의사 그리고 약사들이 지나가는 통로의 역할만 하게 됐다고 자조(自嘲)하고 있다. 이처럼 지난 몇 년간 대학 입시제도가 교육 외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되면서 우리나라 전체의 이공계 인력양성구조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파행을 빨리 바로잡아야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세정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물리학 sjo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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