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박정희는 과연 친일파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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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보수진영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며 분개하고, 진보진영에서는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출발점으로 반긴다. 부일(附日)협력의 과거를 둘러싼 진영 대립이 다시 격화되는 형국인 것이다.

한 원로 역사학자는 사전 발간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우리 역사의 치부를 햇볕 아래 드러냄으로써 “민족사의 해묵은 응어리를 풀고 상생의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치욕의 과거를 정확히 기록해 “미래로 나아가는 지름길로 삼겠다”는 말로 출판 취지를 설명한다. 거의 3000쪽에 이르는 세 권의 사전은 총 4389명에 이르는 인사의 친일 행적을 자료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노작(勞作)으로 집합적 역사담론의 성취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결정적 지점에서 정치적 판단을 내림으로써 사전 전체의 성과를 훼손하고 사전편찬 작업의 진정성을 균열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포함시킨 것이다. 박지만 씨의 제소 등 논란이 한층 가열되자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경북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혈서까지 썼다는 당시 만주신문 기사 사본을 공개했다. 박정희 논란으로 “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며 “객관적 사료를 공개해 이성적 토론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다.

보수세력의 성채 흠집내기

박 전 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가 친일파였다고 본다. 청년 박정희는 일제가 설립한 대구사범학교를 1937년에 졸업한 뒤 일제의 국록을 먹는 문경공립보통소학교 교사로 1940년까지 봉직했다. 교사로 있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우던 23세의 박정희는 나이 때문에 군관모집에 탈락하자 재차 응모해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제출해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신경군사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군사학교 졸업과 함께 박정희는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해 1944년 육사를 마치고 다카키 마사오 소위로 만주군에 배치된다. 광복이 벼락처럼 닥쳤을 때 박정희는 28세였다.

이런 명백한 사실(史實)에 근거해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를 올린 민족문제연구소의 행보가 왜 정치적인가? 한마디로 박정희가 일제 35년 동안의 대일부역행위를 대표하는 4389명의 한 사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미미한 ‘피라미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1917년 일제의 신민이자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체제 안의 신분 상승을 위해 애쓴 그는 광복 때까지 ‘친일인명사전’에 실릴 만한 무게와 행적을 가진 인물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의 기준을 초급장교로 애써 낮추면서까지 그를 인명사전에 넣었을까? 답은 자명하다. 한국 보수세력의 거대한 성채인 박정희를 흠집 내자는 것이다. 대다수 시민에게 신화로 남은 ‘박정희 현상’을 한국인의 역린(逆鱗)인 민족정서를 동원해 해체하려는 것이다. 박정희가 상징하는 기득권 세력을 타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수반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가장 약한 고리’가 청년시절의 친일이 아니라 장년시절의 헌정 파괴에 있다는 걸 감안하면 진보의 이런 전략은 실책에 가깝다.

실책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사전 발간이 주관적 판단을 배제한 학술작업이라는 민족문제연구소의 8년 적공(積功)이 흔들리고 정당한 문제제기 자체가 신뢰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사전이 특정인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며, 과거를 정죄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여는 작업이라는 목표도 퇴색되고 만다. 상생의 계기가 마련되기는커녕 해묵은 불신이 상호 증폭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무리하게 ‘친일인명사전’에 집어넣음으로써 오히려 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이성적 토론의 길이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친일로 시작한 거대한 克日

‘친일인명사전’에는 명암이 함께한다. 민간의 힘으로 친일행적을 발굴하고 자료를 정리한 건 잘한 일이다. 그러나 민족정기라는 고상한 열정 뒤에 편협한 진리정치의 이념, 즉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흑백의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대변하는 도식적 역사관으로는 ‘친일파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적 산업혁명을 낳고 그것이 한국적 민주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대폭발시킨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선악을 칼같이 나누는 도덕원리주의로 재단하기에는 역사의 결은 너무나 깊고도 넓다. 결국 박정희는 작은 친일로 시작했지만 우리 민족에게 거대한 극일(克日)의 지평을 활짝 열면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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