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나홀로 샴페인’은 없다

  • 입력 2009년 9월 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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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마크 피크니 씨(43)는 몇 달 전만 해도 주변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베테랑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자신이 다니던 자동차 부품회사 비스테온이 5월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해고된 뒤 그는 생활비를 아끼려고 케이블TV를 끊었고 취미인 여행도 하지 않는다. 집까지 매물로 내놓았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교정전문치과에서 일하는 간호사 팔로마 로렌테 페냐 씨(36)도 불황의 무서움을 실감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치아 교정을 하려는 고객이 작년의 절반밖에 안 되는 바람에 수입이 크게 줄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가 아픈 건 못 참아도 치아 모양이 마음에 안 드는 건 감수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헝가리 여대생 너지 티타닐라 씨(25)는 금융을 전공한 남자친구가 반년 넘게 실업자로 지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한다. 금융 분야에서 1년을 인턴으로 일해야 정식 취업이 가능한데, 급여를 안 받아도 좋으니 일만 하게 해달라고 사정해도 받아주는 곳이 없다. 일자리를 못 구해 고생하는 남자친구를 보면서 아직 졸업을 안 한 자신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글로벌 경제위기 1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기자 10명이 세계 13개국 중산층 100명을 현지에서 심층 인터뷰하면서 확인한 동시대인들의 생활상은 생각보다 암울했다. 경제위기가 터진 지 1년이 지났고, 각국 정부가 위기 탈출을 위해 경쟁적으로 돈을 풀어댔으니 희망의 싹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중국 일본 등 상당수 국가의 중산층이 대량 실업과 불황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입이 끊겨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황으로 고객이 줄고, 한창 일할 나이에 취업을 못해 낙담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경제의 상승세는 세계의 주목을 끌기에 손색이 없다. 2분기 실질 국민총소득은 21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고 국가 신용등급전망은 경제위기 이후 투자적격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올랐다. 서울 강남권 등 일부 지역에 국한된 사례라고는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당국이 규제책을 검토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위기 이후에 대비해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시점도 한국은 미국과 함께 가장 빠른 축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회복은 ‘절반의 회복’일 뿐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이 선진국들의 실물경제 침체 속에서 ‘나 홀로 호황’을 이어가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의 지출여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약발도 떨어질 즈음이면 경기는 언제든 곤두박질칠 수 있다.

경상수지가 반년 이상 흑자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지만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이 줄어서 생긴 불황형 흑자라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취업자 수가 공공근로 덕분에 6월에 반짝 증가했다가 7월에 다시 줄어든 데서 보듯 고용시장엔 여전히 찬바람이 분다. 수치의 마력에 취할 때가 아니다.

경제시스템의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능했지만 안도하거나 칭찬하기엔 이르다. 취재팀이 한 달간 각국을 돌며 확인한 것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경제위기도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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