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살아보니/류수임]얘들아, 너흰 한국인이란다

  • 입력 2006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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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중국인, 유대인, 이탈리아인에 이어 세계 네 번째 ‘디아스포라’(공동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산민 집단)라고 한다. 특별히 이런 학문적 개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베이징 생활 4년 만에 주변에 한국 사람이 정말 엄청나게 늘어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이 200명도 되지 않던 영국 버밍엄에서 첫 해외 생활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은 터라 자신 있게 시작한 중국 생활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수십, 수백 배 더 어렵고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중국의 거대함에서 오는 현상일 듯싶다.

엄마가 이런 중국 생활에서 살아남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사이 중국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사내아이는 어느덧 엄마를 앞질러 훌쩍 커 버렸다. 예전에 손가락을 빨며 토머스 기차, 디즈니 만화영화를 아무 생각 없이 영어로 보던 아이들은 요즘 한창 유행한다는 일본 액션 만화영화를 중국어로 들으면서 깔깔대고 있다. 매주 일요일 점심 때면 엄마가 기껏 공들여 차려 놓은 식사도 제쳐 놓은 채 위성방송 앞에 붙어 앉아서 한국의 10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실시간으로 따라 부르는 이 녀석들에게는 교육에 관한 엄마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모든 면에서 더 빨리, 더 완벽하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녀석들을 보며 한국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졸업한 엄마가 해외 생활에서 오히려 불리함을 느낀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하지만 이런 글로벌 역량이 떨어지는 엄마에게도 자존심을 만회할 좋은 기회가 한번씩은 있다. 바로 한국어로 된 책을 읽거나 방송을 듣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이 나올 때이다. 그럴 때마다 녀석들은 사전을 들추거나 그토록 함께 놀기 좋아하는 아빠를 찾기보다는 국어선생님 출신인 엄마를 가장 먼저 찾아 뛰어온다.

많은 선배 해외 동포들이 누누이 강조하듯, 세계라는 큰 무대에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한국어로 된 다양한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히는 것이다. 이런 책은 아이들이 어느 나라에서 어떤 말을 사용하고 생활하더라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도록 만드는 훌륭한 정신적 스승이다. 엄마는 그러한 바른 스승을 찾아 주는 조력자일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한국어에 이어 중국어, 영어까지 도대체가 정신이 없을 법도 하건만 녀석들의 뇌 구조는 엄마와 달라서인지 잘도 정리를 해 나가고 있다. 이 녀석들이 다 자랄 때쯤이면 고국도 더 발전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해 있을 텐데, 희망컨대 그때에는 한국 사람, 북한 사람, 조선족 동포라는 구분 없이 모두가 평화로운 동북아시아의 한국인 공동체가 되었으면 한다. 사는 장소가 베이징이든, 서울이든, 평양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올해는 7월 윤달로 인해 늦어 버린 추석이 중국의 국경절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예년 같지 않은 무더위로 힘겹게 지나가는 베이징의 여름 한복판에서 장롱 한구석에 넣어둔 아이들의 고운 한복을 준비하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심어 줄 수 있을까를 또다시 고민해 본다.

류수임 포스코차이나 주재원 부인·전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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