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위용]‘숨겨줄 권한’은 위험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위용 오피니언팀 차장
정위용 오피니언팀 차장
취업이나 결혼, 전직을 앞두고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 때문에 애를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뒷날을 생각하지 않고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사진은 인물 조회에서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 된다. 그 게시물이 다른 사이트로 퍼지면 좀처럼 지울 수 없다. 면접을 앞둔 이들은 ‘주홍 글씨’ 같은 이 기록을 치워 버리고 싶은데 말이다.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사이트는 지금 명예훼손, 저작권 침해, 초상권 같은 인격권 침해 등 몇 가지에 해당되는 타인의 게시물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지워준다. 그것도 법원 판결문이나 입증 자료를 내게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뒤에야 가능하다.

이런 배경에서 뜨는 사업이 ‘디지털 세탁’이다. 무한 복제되는 게시물 시장에 파고들어 의뢰인이 올린 글과 사진을 대신 지워주며 장사를 한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e메일 홈페이지 게임머니의 처리를 대행해주는 ‘디지털 장의사’도 떴다. 궁지에 몰린 의뢰인들은 주머니를 털릴 수밖에 없다.

유럽사법재판소가 2014년 5월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것은 이 같은 사회적 비용과 불편을 감안한 결과다. 한국에도 그 권리가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 정부는 이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지난달 가이드라인을 먼저 내놓았다. 그 뒤 ‘접근배제 요청권’이라는 좀 생경한 용어로 포털에 뿌려졌다.

하지만 벌써부터 달갑지 않은 미래가 보인다. 우선 가이드라인처럼 게시물 삭제를 최종 결정할 곳이 포털 관리자로 될 게 유력하다. 그렇게 되면 포털은 지금처럼 삭제 결정을 무슨 권한처럼 휘두르며 판관(判官) 노릇을 할 것이다.

그런 조짐은 구글이 보여줬다. 지난해 구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5월 이후 구글에 접수된 삭제 요청은 102만7495건. 이 중 구글은 시효성과 적법성을 따져 41.3%만 삭제해줬다. 선별적 삭제였다. 요청이 거절된 이용자들은 “민간 회사가 삭제 여부를 판단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삭제 거부에 이견을 내지 못한다는 불만도 잇따랐다.

누가 구글 같은 사기업에 선별을 결정하는 판관의 자격을 줬는가. 포털은 삭제 대상 게시물을 기업과 고객 개인 간의 문제로 보고 처리한다. 삭제 요청자의 게시물은 사적 데이터이다. 그렇지만 이런 데이터가 모아지면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개인들의 휴대전화 위치 데이터가 모여 교통 정보를 알려줄 때 공공 데이터가 되는 것처럼. 아무리 무심코 올린 게시물이라도 사기업이 함부로 손대면 곤란한 이유다.

사적인 처리는 자의적 해석과 처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어떤 게시물은 삭제해주고 어떤 것은 되지 않는지에 대한 기준도 공공의 이익에 앞서 사적으로 정해진다. 맘대로 삭제가 가능하다. 이쯤 되면 이용자가 누려야 할 ‘잊혀질 권리’가 포털 관리자의 ‘숨겨줄 권한’으로 변질된다. 범죄 전력자는 그 허점을 이용해 과거 기록을 깨끗하게 세탁할 수 있다. 그런 기가 막힐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15년 전 중범죄를 저지른 한 남성은 “포털에서 내 개인정보를 다 지웠으니 언론사 사이트에서도 마저 지워 달라”고 요구했다. 포털의 맹점을 이용해 언론사를 제외하고 디지털 세탁을 끝낸 사람이었다. 잊혀질 권리에서 파생된 삭제 권한을 포털에 맡기면 이 사회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공정성이 담보된 제3의 기구가 삭제를 최종 결정해야 한다. 공무원에게 맡기면 이용자들이 또 골탕을 먹기에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독립 기구가 좋다. 포털은 기구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곳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포털의 선별 횡포는 지금까지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정위용 오피니언팀 차장 viyonz@donga.com
#디지털 세탁#잊혀질 권리#게시물 삭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