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왜 시간은 항상 부족한가… 손목시계 떼버린 농부 “자연의 박자에 맞춰 살아보시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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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플로리안 오피츠 지음·박병화 옮김/268쪽·1만5000원·로도스

비싸기로 소문난 노스페이스 등산복은 한국 청소년부터 알래스카 에스키모까지 세계인이 입는다. 이 정도 회사의 소유자라면 세계 곳곳의 대도시에 빌딩 여러 채를 세우고 있지 않을까.

그런 예상과 달리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더글러스 톰프킨스는 칠레 남단 파타고니아의 황무지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있다. 끊임없이 신상품을 만들어 수요를 자극하고 엄청난 자원을 낭비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회의를 품고 20여 년 전 지분을 매각해 파타고니아의 농가로 찾아든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속도를 내는 생활방식은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며 “급제동을 걸어 속도를 늦추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에 연결되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컴퓨터로 무장한 채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안달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산다. 우리가 아낀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처럼 시간도둑들이 훔쳐간 것일까.

독일에서 방송기자 겸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바쁘게 일하던 저자는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던 삶에서 벗어나 천천히 사는 삶에 주목했다. 몇 해 전 아프리카로 탐험을 떠났다가 스파이 누명을 쓰고 나이지리아 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돼 두 달간 억류됐을 때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아들이 태어나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

그는 우선 우리가 왜 이토록 불안하게 쫓기며 사는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났다. 하지만 시간 관리의 비법을 가르쳐준다는 인기 강사의 세미나는 실망스러웠다. 강사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뻔한 말을 하며 난데없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처럼 마술을 보여줬고 청중은 사이비교도처럼 박수를 치며 줄을 서서 그의 책에 사인을 받아갔다. 이번엔 저자가 혹시 탈진증후군에 걸렸는지 의심돼 전문의를 찾아갔지만 “휴대전화와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문의의 조언처럼 6개월간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끊고 사는 실험을 한 일간지 기자는 “질적으로 향상된 시간을 누렸다”면서도 이날이 실험의 마지막 날이라며 “내일 다시 인터넷을 시작한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저자는 뉴스 및 금융 정보를 제공하는 로이터통신 유럽본부에 방문해 속도전을 부추기는 것은 자본주의경제와 경쟁의 논리라는 것을 눈으로 깨달았다. 경쟁사보다 100만분의 1초라도 빠른 뉴스를 제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세계에서 시간은 곧 돈이었다.

마침내 저자의 발길은 속도와 경쟁에 집착하는 세태에 따르지 않고 느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리먼브러더스의 중역이던 루돌프 뵈첼은 사직서를 던지고 스위스의 산속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알프스에서 등산객을 위한 산장을 운영할 준비를 하며 감자를 깎고 장작을 팬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는 뭘 하든 내일로 미루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미루는 것은 현재를 평가절하하는 행위거든요. 나에겐 항상 현재가 제일 중요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행복합니다.”

스위스 산골 마을의 바츨리 가족은 3대가 모여 살며 농장을 운영한다. 아이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소젖을 짜고 치즈를 만들면 아빠와 엄마는 겨울을 대비해 건초를 만든다. 아빠 프리츠는 손목시계를 차지 않는다. “시계를 안 차고 다니는데 큰 문제는 없어요. 교회 종소리가 시간을 알려주니까요. 밖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자연스레 시간 감각이 생깁니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가속화된 세상의 고삐를 늦출 방법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 개념을 제시한다. 정부가 억만장자에서 노숙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민에게 법적으로 고정된 균등한 생활비를 지급하라는 제안이다. 가속화는 경쟁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기본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천천히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독일에서는 모든 성인에게 매달 약 200만 원을 기본 소득으로 주자는 얘기도 나온다고 덧붙인다.

이런 비현실적 대안에 김이 빠지고 천천히 살자는 메시지가 새롭지도 않지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은 분명하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느린 삶을 살고 행복을 얻었는지 엿보는 것으로도 우리가 삶과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크든 작든 달라지리라는 것이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책의향기#인문사회#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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