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조선의 선비들, 방에 누워 세상을 유람하다

  • Array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양화소록/강희안 지음·이종묵 역해/500쪽·2만5000원·아카넷

중국 청대 ‘화초충어도책’에 그려진 산다화(동백,위). 조선시대 18세기 화가 강세황의 ‘청공도’. 선비의 책상 왼편에 괴석과함께 화분에 심은 매화가 보인다(가운데). 화분에 소철, 세죽, 괴석이 있는 중국 청대 ‘분춘생의도’(아래). 아카넷 제공
중국 청대 ‘화초충어도책’에 그려진 산다화(동백,위). 조선시대 18세기 화가 강세황의 ‘청공도’. 선비의 책상 왼편에 괴석과함께 화분에 심은 매화가 보인다(가운데). 화분에 소철, 세죽, 괴석이 있는 중국 청대 ‘분춘생의도’(아래). 아카넷 제공
설중매(雪中梅). 추운 겨울 흰 눈 속에서 피어난 탐스러운 매화를 조선 선비들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다. 사나운 바람도, 거센 눈보라도 그 뜻을 꺾을 수 없는 절개와 고매한 풍격을 상징하는 군자의 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중국의 남방에서도 음력 2월이 돼야 매화꽃이 피는데, 조선에서는 일부 해안지역을 제외하고 한겨울에 피는 조매(早梅)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선비들은 집 안에 매합(梅閤) 매각(梅閣) 매옥(梅屋)이라 부르는 매화 화분용 공간까지 만들어 한겨울에 매화꽃을 피워 구경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꽃봉오리가 가지에 붙으면 따뜻한 방에 들여놓고 더운물을 가지와 뿌리에 뿜어준다. 화로에 숯을 달구어 그 곁에 두어 한기를 쐬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 동지 전에 활짝 꽃이 피어 맑은 향이 방에 가득해진다. 화분의 매화는 꽃이 진 후에는 한기를 쐬지 않도록 다시 움집 안으로 들여놓아야 한다.”

조선 초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강희안(1418∼1465)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이처럼 화분에 심은 꽃과 나무를 보며 마음을 수양했던 선비들의 원예문화가 담겨 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규장각 새로 읽는 고전총서’ 시리즈의 첫 권이다. ‘양화소록’ 원전뿐 아니라 고려 조선 중국의 문헌을 두루 살피면서 한국 분재 문화의 변천사를 풍부하게 풀어냈다.

현대인들이 도심 아파트에서 꽃을 기르고, 주말농장에서 텃밭을 가꾸듯 조선의 선비들은 벼슬에 매여 도성 안에 살 때도 뜰에 못을 파 연꽃을 길렀다. 몇 그루 운치 있는 나무를 심은 후 기암괴석을 갖다 놓고 즐기기도 했다. 선비들이 화분에 꽃을 키우는 뜻은 누워서도 아름다운 산수 자연을 상상으로 즐길 수 있는 ‘와유(臥遊)’에 있었다.

책에는 노송, 만년송, 오반죽, 국화, 매화, 난초, 서향화, 연꽃, 석류꽃, 치자꽃, 자미화, 귤나무, 석창포 등 16종의 식물에 괴석을 붙여 총 17종의 정원을 꾸미는 내용이 나온다. 옆으로 구불구불하게 자라는 노송을 분재로 키우는 법, 괴석에 이끼가 끼게 하는 법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음력 5월 13일은 대나무를 옮겨심기에 가장 알맞은 날이다. 대나무는 절조가 강해서 무척 까다롭지만 이날만은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며 나른해지기 때문에 옮겨 심어도 잘 살아난다고 한다. 그래서 5월 13일을 대나무가 술에 취한 날 죽취일(竹醉日) 혹은 대나무가 정신이 흐릿해지는 날 죽미일(竹迷日)이라고 한다.”

조선 선비들에게 꽃을 키우는 일은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르는 방편이었다. 선비들은 난초, 국화, 대나무, 석류 등을 기르며 세상을 경계하는 시문을 남겼다. 조선 중기의 학자 홍유손은 “국화가 온갖 화훼 위에 홀로 우뚝 선 것은 빠르게 피어나지 않고, 된서리와 찬바람을 이기고 늦가을에 피기 때문”이라며 너무 이른 성취를 경계하는 마음을 깃들였다.

화분의 꽃을 선비들은 눈으로, 코로 즐겼다. 가장 운치 있는 방법은 촛불을 이용해 꽃과 잎의 그림자를 완상하는 것이다. 강희안은 난초 꽃이 피면 촛불에 비춰보며 “마치 한 폭의 묵란(墨蘭)이 벽에 그려진 듯하다”고 탄복했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 ‘국화 그림자놀이’를 하는 시주(詩酒) 장면을 남기기도 했다.

“국화의 위치를 바로잡은 뒤 벽에서 약간 거리를 두게 하고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 밝히게 했다. 그제야 기이한 문양과 특이한 형태가 갑자기 벽에 가득했다. 제일 가까이 있는 것은 꽃과 잎이 서로 교차하고 가지가 빽빽하고 정연해 마치 수묵화를 펼쳐놓은 것과 같았다. 그 다음 가까운 것은 너울너울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서 마치 달이 동쪽 고개에서 떠오를 때 뜰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았다. 모두들 박수치고 소리를 다 지르고 나자 술을 내오게 하여 시를 짓고 즐겼다.”

책 곳곳에 옛 화가들이 그린 아름다운 꽃과 나무, 괴석이 있는 분재 그림이 시각적 효과를 더한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의 그림이고 조선 화가들의 그림은 적어 아쉽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