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앵거]봇물 터진 ‘글로벌 앵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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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얼룩 ‘탈선 자본주의’… 성난 지구촌 청년들 거리로

“우리의 행동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에 대한 최후의 경고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해준 것이 뭐가 있나. 지금 미국은 최대 위기다. 바로 ‘정당성의 위기(Crisis of Legitimacy)’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미국 월가 시위의 웹사이트에 2일 이 같은 메시지가 올라왔다. 월가 시위대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와 트위터, 페이스북에는 비슷한 메시지가 수시로 올라오고 있다. 미국 내 저명한 민권 운동가인 코넬 웨스트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국이 ‘민주적 각성’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평했다.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이후 사회적인 문제에 무관심했던 미국에서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 30대 젊은층이 주도하는 시위는 더는 월가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 3일부터는 공공부문 노조와 기업 노조 등 노동자 연대시위를 본격화한다. 억눌려 있던 미 경기침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이번 시위를 통해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로스앤젤레스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시청사 주위를 둘러싸고 이틀째 밤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시위대에 지지를 표하고 있다.  
▼ 지구 한쪽서 일어난 시위가 SNS 통해 세계화 ▼

시카고에서는 ‘시카고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연방은행과 무역위원회 건물 주변에 텐트를 치고 열흘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시카고 시 당국이 시위대가 공공건물 주변에서 잠자는 것을 금지하자 시위대는 밤 시간에 2교대로 움직이며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다. 보스턴 덴버 앨버커키 포틀랜드 프로비던스 등에서도 지난 주말부터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예고되고 있다. ‘토론토 주식시장을 점령하라(Occupy Toronto Market Exchange)’라는 이름의 시위대는 토론토 증권가인 베이가(Bay Street)에서 15일부터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830여 명이 페이스북을 통해 참가 의사를 밝힌 가운데 밴쿠버 몬트리올 캘거리 등에서도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미국 캐나다 시위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올 한 해 영국 독일 이스라엘 스페인 그리스 등 선진국에서 젊은이들이 광장을 점거한 채 텐트를 치고 장기 시위를 벌여 지구촌을 달궜다.

기아와 전제주의 통치체제의 굴레를 벗어난 지 오래인 이들 선진국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선 밑바탕에는 ‘분노’(anger)가 깔려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매개로 경제난에 기인한 실업 증가와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적 박탈감을 가진 전 세계 젊은이들이 분노로 뭉치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글로벌 앵거(Global Anger)’의 시대다.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칼럼에서 “세계화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정보기술(IT)이 (청년들의) 분노를 세계화하고 있다”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시위가 반대편 시위 참가자들을 독려하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분노하는가.

뉴욕타임스는 “처음에는 수십 명 수준으로 일종의 ‘농담’(joke)처럼 시작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각성’(disillusionment)”이라고 지적했다. 즉 ‘역사의 종말’을 저술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스탠퍼드대 교수) 같은 학자들은 ‘역사의 진로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고 주장했지만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0년 인터넷 거품 붕괴, 2007∼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최근의 미국 재정적자와 유로 위기 등 신자유주의 체제는 잇달아 경제위기를 몰고 왔다. 그런데도 정책 결정자들이 국민을 위기에서 구해줄 만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 청년들이 가진 환멸과 좌절감이 시위라는 극적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탐욕적으로 변질된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있지만 이 같은 사회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영국 진보운동가 오언 존스는 “자본주의가 1920년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며 “정책 결정자도, 시위대도 지금의 위기 상황을 해결할 만한 대안적 비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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