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테러-학살 억울한 죽음 당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

  • Array
  • 입력 2011년 8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유령들/정한용 지음/152쪽·8000원·민음사

중국 난징에 들이닥친 일본 군인들은 민가의 열여섯, 열넷 두 소녀를 성폭행한 후 참혹하게 죽였고 어린아이의 목을 대검으로 잘랐다(‘살인을 추억하다’).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독재 시절 민주투사들은 난쟁이가 입으로 성기를 물어뜯는 고문을 받았고(‘미라발 자매의 노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단체로 죽게 된 후 우수한 품질의 비누로 다시 태어났다(‘풍경들’).

그의 시는 쉽게 읽혔지만 무척 불편했다. 눈살이 찌푸려졌고 몇몇 대목에선 구역질도 났다. 모조리 우리 같은 사람이 자행한 일이라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정한용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유령들’은 이처럼 전쟁과 테러, 노예사냥, 인종·민족 차별, 정치적·종교적 분쟁에 뒤따랐던 제노사이드(genocide·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노예로 팔려가는 흑인, 킬링필드로 아버지를 잃은 캄보디아 소년, 서방의 침략을 받은 이라크 아낙네 등의 입을 빌려 섬뜩한 현장을 고발한다.

시인은 가해자의 사정도 놓치지 않았다. “애새끼 아녀자 늙은이 가릴 것 없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총으로 쏘아 죽인” 월남전 참전 한국인 병사는 고국의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에서 “나 미쳤어. 내가 왜 이런 짓 하는지 몰러, 엄니. 여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라고 절규한다(‘월남 뉘우스’). 제노사이드 상황에선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희생자인 것이다.

아마 대다수 독자는 ‘내게 또는 내 주변인들에게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6·25전쟁 때 결혼 3개월 만에 남편을 잃은 기자의 할머니는 지금도 총 쏘는 장면이 담긴 전쟁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몇 년 전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 주한미군이 이라크로 전출된 후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시인은 “죄 없이 죽었고 ‘불편한 진실’이란 이유로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잊혀진 ‘유령들’을 대변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집은 함부로 교훈을 강요하거나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기 있다”며 울부짖는 그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