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한국의 집’ 내부를 바꾼 식탁과 세면대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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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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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주거의 미시사/전남일 양세화 홍형옥 지음/432쪽·2만 원·돌베개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은 주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공간인 안채는 대문에서 최대한 깊숙이 자리 잡았고 안방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부엌도 남성들의 공간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식사 때면 먼 곳까지 밥상을 날라야 했다. 근대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변화가 일었다. 1970년대 이후 식탁이 등장했고 식사 공간이 부엌에 가까워지면서 주부의 동선은 훨씬 짧아졌다. 남녀의 생활공간이 평등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해 가족 내 주부의 역할과 지위도 바뀌어갔다.

가족 형태의 변모도 거주 공간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말 보급되기 시작한 국민주택은 42.9∼49.5m² 규모에 마루를 중심으로 세 개의 방을 배치한 구조. 4, 5명으로 구성된 핵가족의 생활에 안성맞춤이었다. 저자들은 “주거를 인간의 삶과 생활, 주변의 시시콜콜한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바라봤다”고 말한다.

가족 구성원의 위상 변화도 주거의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통 주택에선 자녀를 위한 방이 따로 없었다. 아동은 동성의 성인 근처에 머무르면서 성별에 따라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개화기 들어 아동의 공간에 대한 의식이 싹텄고 1915년 열린 가정박람회에선 유희실, 공부실, 침실로 구분한 아동실의 이상적 모델이 처음 등장했다.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아동들은 점점 더 많은 옷과 책, 장난감을 갖게 됐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가장 크고 좋은 위치의 방이 부부 침실이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아동실을 가능한 한 넓게 확보해 주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집의 기능도 세월에 따라 변했다. 조선시대에는 집과 일터의 구분 없이 생산과 소비가 주거 공간 내에서 함께 이뤄졌다. 취침, 휴식, 손님 접대 등 거의 모든 일상과 혼례, 상례, 잔치 등의 비일상적인 활동은 물론 음식 보존, 가사 작업, 농사일 등 재생산 활동이 집에서 이뤄졌다. 산업화를 거치며 생산 기능은 공장으로, 교육 기능은 학교로 이전됐고 집에는 주거의 목적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서양식 주거 문화의 등장으로 새로운 개념이 생기기도 했다. 수세식 양변기가 들어오고 씻는 곳과 용변 보는 곳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등장한 ‘화장실’이 대표적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릴 적 살던 집, 동네 골목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저자들은 “먼 과거가 아니다”면서 “전통적 생활공간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안락하고 세련된 주거공간 안에서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아쉬움을 늘 갖고 있다”고 말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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