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녹슨 철처럼 영혼도 녹슬다

  • 입력 2008년 12월 6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김숨
◇ 철(鐵)/김숨 지음/278쪽·1만 원·문학과지성사

산업화의 그늘에 절망하는 사람들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 있다. 농사짓기엔 땅이 척박했고, 마땅한 자원도 철도나 부두시설도 없었다. 배운 것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주민들. 그 뻔한 마을에, 3년 전 북쪽 어귀에 ‘조선소’가 들어섰다.

철선(鐵船)을 만드는 조선소는 단박에 마을의 희망이 됐다. 날마다 노동을 제공하니까, 배곯지 않고 끼니를 이을 수 있으니. 사내는 누구나 ‘조선소 노동자’가 되려 했다. 여인네는 모두 다 노동자 아낙이 되고파 했다. 등 굽은 꼽추도, 왜소한 배복만도, 심지어 일흔 먹은 황신구마저. 조선소를 꿈꾸고 쇠를 찬양했다. 모든 생활용품을 쇠로 바꾸고, 녹(綠)을 청심환처럼 떠받들었다. 조선소 최고, 철 만세. 그리고 그때, 바람에 휩쓸린 녹 찌꺼기가 온 마을을 휘감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중동에 건설노동자로 떠났다 돌아온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다뤘던 소설 ‘백치들’(랜덤하우스코리아·2006년)의 작가가 2년 만에 두 번째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지난해 소설집 ‘침대’(문학과지성사)에서도 뚜렷했던, ‘메마른 문체로 잘금잘금 절망 속으로 무너져 가는’ 특유의 화법은 여전한 채로.

소설이 다룬 시기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언제쯤. 시기만 앞당겨졌을 뿐, 노동에 몸을 팔던 ‘우리네 아버지’ 모습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주체는커녕 자본주의 사회란 쳇바퀴 속에서 부속품처럼 이용되다 녹슬어 가는. ‘얼굴 없는 다수’의 슬픈 자화상이 담담히 흘러간다.

마을 주민들 얘기지만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휩쓸리며 ‘살아내는’ 모양새처럼 소설 속에서도 주체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노동자에게 시집갔다 한 달 만에 과부가 돼 뜨내기의 사생아를 낳는 양금영, 부모 봉양하러 조선소에 취직했으나 명절에도 찾아뵐 짬이 없는 김태식. 작가는 그들의 성명 하나하나를 부러 새겨 넣지만 단지 그뿐. 그들은 낡은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번호부에 실린 깨알 같은 인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은 ‘철’ 자체다. 처음부터 사람이 쇠를 이용한 게 아니었다. 철이 사람을 부렸다. 주민들은 쇠에 의지하고, 쇠를 경배하고, 쇠로 인해 먹고살았다. 생니를 뽑고 철 틀니를 끼워 넣으며 영원을 꿈꾸었다. 이윽고 틀니가 산화해 입조차 못 벌려도 그건 쇠의 탓이 아니었다. 더 나은 쇠, 더 좋은 철. 그 속에 찬찬히 끼어가는 녹이 영혼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고서.

소설 ‘철’은 쓸쓸하다. 할머니 옛날얘기처럼 우화 분위기가 물씬하면서도 끔찍한 잔혹 동화의 처연함이 가득하다. 읽으며 빠져드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도, 왜 한장 한장 넘길수록 손끝이 무거워지는지. 그건 작가가 현실보다 더 현실에 가까운 동화를 풀어냈기 때문일 터.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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